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는 1940년 9월 1일, 노동자에서 소상인이 된 부모를 둔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문학교수 자격을 획득한 아니 에르노의 자전소설 『남자의 자리』는 원제가 『자리(La place)』였다. 영어로 번역하면서 바뀐 제목으로 남자는 곧 아버지를 가리키는데 삶의 문학(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합당한 작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친 일요일, 그녀는 돌아가는 일등석의 기차에서 자신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부르주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리옹의 고등학교 교사가 된 그녀는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너무 늦게 인식해서 아찔했다고 고백한다. 사춘기 시절의 아버지와 그녀 사이의 거리, 계층 간의 거리감이 이별한 사랑처럼 아픈 자책으로 다가왔다. 불현듯 그것을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중간쯤에 이르러 소설을 쓰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아버지의 삶을 설명하려니 예술적인 것이나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빼야 했다. 이 소설로 르노도 상을 받았을 때 아니 에르노는 한 방송에서 말했다. 아버지의 존재로 소설을 쓰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다. 소설의 인물로서 아버지를 미화하게 되고 아버지의 삶을 진실하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자각이다. 거짓 기억에는 삶을 시어나 은유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고 말한 그녀가 아버지를 기억해 내는 방식은 미화 없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단조로운 글쓰기였다.   포장하지 않고 존재를 그대로 드러낼 때 문학적 가치가 없는 것인가? 문학이 존재보다 더 나은 가치라 믿는 것은 아닌가? ( 『남자의 자리』, 옮긴이의 말, 기억의 방식, 신유진, p110 ) 그녀는 “문학은 인생이 아니에요. 문학은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는 것이거나, 혹은 밝혀야만 하는 것이죠.”라고 했다. 옮긴이 신유진은 ‘삶이 먼저, 문학은 그다음이다. 삶이 문학이 되기 위해 꾸며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말로 아니 에르노의 말을 해석했다. 『남자의 자리』에는 아버지의 삶이 있다. 아니 에르노는 한 남자인 그 아버지의 삶을 쓴다. 아버지가 살아온 자리를 보탬도 뺌도 없이 말한다. 아버지는 쾌활한 사람이었으나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미술관에는 가본 적이 없고, 사는 데는 책이나 음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의 삶은 물질적 필요에 얽매여 있었다. 그는 다만 자기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농가의 일꾼이었던 할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공장노동자로 살다가 같은 노동자였던 어머니를 만나 카페 겸 식료품점을 차렸다. 그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육 수료증 준비반이 된 아버지를 학교에서 빼내어 자신이 일하는 농장에 집어넣었는데 그땐 먹여 살릴 수가 없어서 모두가 그랬어,라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였다. 독자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가? < > 속의 말은 의미심장한 작가의 의도성을 내포한다.   아버지는 키가 컸고,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었고, 자세가 매우 꼿꼿했으며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들은 <다시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장식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했을 뿐.>   공산주의자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혼자만 간직했다. <장사하는 데에 그런 건 필요하지 않다고.>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   디프테리아로 어떤 소녀가 죽었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창문 밖만을 바라보다 이유 없이 <자신의 몸을 때렸다.><어쨌든 살아야 했다> <나는 팔이 네 개가 아니야.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고. 나는 몸살도 걸어 다니면서 앓아야 한다니까!>이 계집애는 <아끼는 법>이 없어. <분수를 알아야 해.><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식사를 하던 중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움이 터지고는 했다. 그가 <대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옳다고 믿었다. 그래, 다음에 보면 되지. 그는 내색하지 않고 <감정을 숨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가 읽었고 기억하던 유일한 책, 『두 어린이의 프랑스 일주』의 잠언적 문장을 통째 인용하는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우리의 운명에 항상 행복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326호) 『남자의 자리』, 재인용 p24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숭고한 교훈 능동적인 사람은 단 일 분도 허비하지 않으며, 하루가 끝나면 그날의 매시간이 그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줬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태만한 사람은 힘든 일을 늘 다른 때로 미루고, 침대에서나 식탁에서나 또한 대화 중이거나, 어디서나 잠을 자고 자제심을 잃는다. 하루가 끝나 가는데 그(태만한 사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몇 달이, 몇 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남자의 자리』, p25 정말 그런 것 같다. 다만 하류라 여겨지는, 우리 집은 잘 살지 못한다는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에서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점,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 또는 고백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이 안쓰럽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가난한 삶 역시 우리의 것이었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소외라고 생각된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행복이지만, 소외라는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이라고 고백하는데 나는 이 점이 안타깝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말해주고 싶다.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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