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내 가슴 한 구석에 막연히 품던 바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혼자서 혹은 친구와 둘이서 시외버스를 타고 짧은 여행 기분으로 간혹 들리던 이곳 경주가, 그때 나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 무렵의 경주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황리단길도 없었고 지금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는 고층 아파트도 없었지만, 가세가 쇠락하여 하인들조차 다 떠난 빈 집을 꼿꼿한 등과 야윈 어깨로 떠받치고 살아가는 대갓댁 노마님같이 범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었습니다. 또, 살림집 사이로 누운 고즈넉하면서도 도도하던 고분들이 자아내던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음(中陰)같은 몽환적 분위기에 잡혀서 언젠가 여기서 살게 되면 좋겠다는 원(願)을 품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경주는 나와 아무런 인연도 없었으니 막연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이후 우연히 자리 잡아 살아 온 지 하마 서른 해도 훌쩍 넘었습니다.
  아무런 혈연도, 학연도 없으니 만날 사람도 딱히 없어 외롭다 생각이 들면 경주 박물관 마당에 앉아서 목이 없는 석불들을 바라다 앉아 있곤 하던 때가 엊그제만 같습니다. 그리고 황성공원 활터 ‘호림정’ 뒤에 도열해 있던 비석들 사이를 걸으며 여러 풍상(風霜)에 낡고 닳아 희미해진 글씨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아는 글자라고는 몇 안 되는 한자를 읽어 보려고 애 쓰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인이 되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아무개를 영세불망(永世不忘)하고, 송덕(頌德)하며, 청덕(淸德)을 길이 알리노라는 비문에 나무 사이로 비친 햇살이 빗겨들면 오히려 사람의 한 살이(一生)가 허망해지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내가 나고 자라고 대학을 다녔던 고향 도시에 들렀습니다. 머리칼이 희끗한 나이가 되니 자주 들러야 할 일도 없어진 그곳 도심에서 무료하게 두어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간도 보내고 다리도 쉴 겸 학창시절 친구들과 머리를 쉬러 가끔씩 가던 도심 한가운데의 작은 공원을 찾았습니다. 어수선하고 산만하던 과거 모습과 달리 깔끔하게 가꾸고 정돈한 데다가 이름도 바뀐 공원을 한 바퀴 도는데, 그곳에서도 공원 한 쪽에 도열한 비림(碑林)과 맞닥뜨렸습니다.
  공원을 다시 정비하면서 향교나 시내 도처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는 설명도 붙었습니다. 판관(判官), 관찰사(觀察使) 등의 벼슬을 지낸 관리들의 이름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선정애민비(善政愛民碑), 송덕비(頌德碑)같은 칭송 일변도의 제목에 비를 세운 내력을 뒷면에 새겨놓았더군요. 맑은 덕으로 백성을 위해 베푼 정치를 기린다, 그런 내용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좋은 정치와 백성을 사랑한 점을 기린다 등, 목민관이 임지를 떠날 때 그의 덕을 입은 지역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고 오래 기억하겠다는 내용으로 비교적 대동소이한 편입니다. 저런 관리가 다스리던 그때는 백성들의 살이가 그나마 좀 나았을까요?
  사실 송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임자나 백성들의 추천을 통해 엄격하게 심사하고 임금의 허락을 받아 세웠습니다. 그러나 재임 중에 백성을 부추겨 세우거나 혹은 자비를 들여 스스로 송덕비를 세우는 사례도 많았다고 합니다. 한 예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라도 지역 균전사였던 김 아무개는 고부군수 조병갑과 함께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있지도 않은 토지나 농사지을 수 없는 땅임에도 세금을 매기고, 농지 면적을 부풀려서 세금을 매겨 그 자신 막대한 치부를 한 대표적 탐관오리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도 전주 모악산 밑에 영세불망비를 버젓이 세웠다고 합니다. 지역 면사무소 마당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의 비문은 특이하게 다른 비문보다 더 깊고 굵게 새겨져있다 합니다. 아마도 비문을 새겼던 석공은 그의 악행을 후세들이 영원히 잊지 말라고 정을 두드리는 망치에 더 힘을 주었던가 봅니다. 그야말로 그의 악행이 ‘영세불망(永世不忘)’하라고요. 자비로 세웠든, 어거지로 세우게 했든 그의 비석은 오히려 징계비(懲戒碑)가 된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국 곳곳의 송덕비들은 목민관의 인간됨이나 행정 능력을 백성들이 판단하고 평가한 결과치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봉건전제군주국가이던 그 시대에도 백성의 눈을 두려워하긴 했나 봅니다. 그런데 정당의 이해관계와 정치인 개인의 안위만을 위해 모사(謀事)하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하는 작금의 여야 정치인들은 과연 저 정도쯤이라도 국민을 의식하고는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공원을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