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과 자취와 발자국은 모두가 과거의 소산이다. 과거란 지나간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어법으로 지나간 때, 일, 사건을 설명한 것으로 확실한 일은 과거 뿐이다. 위대한 성자라도 과거를 개혁할 수는 없다. 장래에 대한 최상의 예견은 과거를 되돌아 보는 데에 있다. 세상 누구던 과거에 의하지 않고 장래를 판단하는 길을 모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가요, 과학자로 피뢰침을 발명한 프랭클린은, 이미 흘러간 물로써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을 고민한다고 해서 흘러간 물이 다시 오지는 않는다. 슬프나, 분하나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고, 오늘로서 생활하자. 과거의 한 토막으로 날마다 새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어떤 힘 있는 권력을 모아도 지나간 과거를 불러올 수는 없다. 어찌하여 그 지난간 일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가. 과거·현재·미래는 떨어져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다. 옛 사랑, 옛 희망, 옛적의 꿈, 오래 전의 이야기, 지난 날의 어려움 지나고 나면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 때는, 왕년에는’ 하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우수(근심과 걱정)가 있고, 상실한 시간 속에서만 행복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오늘의 옛날이고, 오늘은 내일의 옛날이다. 소년은 미래를 보고, 장년은 현재를 보고, 노년은 과거를 보며 산다. 사자성어에 ‘창왕찰래’란 말은 지난 일을 명찰(똑똑히 살핌)하여 장래의 득실(얻음과 잃음)을 살피라는 의미다. 오늘은 어제 사망한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고, ‘온고지신’은 옛 것을 연구하여 거기서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내는 일이고, ‘온고지정’은 옛 것을 살피고 생각하는 마음인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온 과거가 흔적으로 남는다. 흔적은 뒤에 남은 자취나 자국으로, 또는 어떤 물체에 다른 물건이 닿거나 하여 생긴 자리이며, 일의 근원이 발달하여 생긴 곳이기도 하다. 흔적은 귀중한 표상이 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상처가 되기도 한다. 시인 롱펠로의 시(詩)에 “왕들은 모두 어디에 있으며/그리고 일찍이 이 세상을 주름잡던/위인들은 전부 어디 갔느냐/다 가버렸구나/그들의 호화와 찬란과 함께/흔적조차 찾을 길 없구나./어느 화가의 고백에서, 얼굴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표정과 독특한 우아함과 그리고 반대로 얄궂은 심술이 역역한 그의 그늘진 모습이-화가는 마음의 괴상함도 그려낼 수 있는 기술. 그것이 그의 살아온 일생의 자취가 진실로 나타난다.   어떤 동화책이 실린 얘기 하나가 있다. 늑대가 양(羊)의 가죽을 입고, 양의 울음을 토하면서 점잖게 지나갔다. 모두가 양인 줄 알고, 귀여운 모습으로 쳐다보면서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그러나 그 양은 진짜 양이 아니고, 늑대인 것으로 탄로가 났다. 탄로는 비밀 따위가 드러난 것이다. 양의 가죽을 쓰고 양의 울음도 흉내내고 지나갔지만 발자국이 말썽이었다. 양이라 허풍떨고 지나간 길바닥의 흔적(자취)은 늑대의 발자국으로 판명되어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노력한 결과물이라 자화자찬해도, 지나온 역사와 남긴 흔적에서 모든 일이 평가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일평생 살면서 종말에 가서는 무엇을 남길 것에 대한 고민을 한다. 이름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재산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숭고한 신앙(믿음)일까, 책일까. 저마다 많은 생각으로 인생의 나이는 저물어가고 있다. 사람의 이름(명성)은 실체(본체)의 그림자이다. 명승지 곳곳에 가면 자기 이름을 남기고 알리고 싶어 벽이나 바위에도 밝히고 있다. 이름 알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까? 재물(재산)을 후대에게 헌신하여 물려준다는 것 또한 귀한 일이다. 요즘처럼 나눔의 봉사가 매우 훌륭한 결단이라 높이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부자라고 나눔에 앞장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눔의 정신은 곧 신앙의 정신이요,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오히려 솔선하는 흐뭇한 사회에 인간의 가치를 평가받는 세상이다. 이승에서 벌어 놓은 귀한 재물. 저승에 갈 때는 빈 몸인데 –입고 갈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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