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기로 꽤 장수한 TV 방송프로그램 중에 어린이들 대상으로 동요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더랬습니다. 각 지역이나 학교에서 노래 잘 한다는 어린이들이 출연하여 동요부르기를 겨루던 경연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요즘 여기저기 방송에서 하는 노래오디션 프로의 어린이 버전이라고 할까요?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아이나 예쁜 옷으로 한껏 모양을 낸 여자아이가 두 손을 배꼽 앞에서 마주잡고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맞추고, 아직 변성기 전인 깨끗하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누가누가 잘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성악에 소질 있는 어린이들에게 재주도 뽐내고 실력을 검증받을 기회가 되니 어린이 본인도 그러했겠지만 뒷바라지하는 학부모나, 지도교사에게는 한 번 나가 보고 싶은 무대였을 겁니다.
  갑자기 웬 어린이 노래 대회냐고요? 연관되는 나의 옛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그러느냐고요? 천만에요. 나는 음치라 할 만큼 노래에 재능이 없어서 학급 아이들 앞에서조차 불러 본 적 없고, 더구나 내성적인데다 소심한 성격이라 그런 대외 행사는 나갈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습니다. 다만 요즘 TV나 인터넷 뉴스를 보면 뜬금없이 그때의 그 프로그램 타이틀이 더오를 때가 더러 있어 쓴웃음을 흘리게 합니다. 최근의 정치권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여당이고 야당이고 가릴 것 없이 누가 더 막말을 잘 하는지 겨루어 보자고 작정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한 쪽에서 ‘광우병 사이비 종교 신봉자’라고 하니 반대쪽에서 ‘마약에 도취되었냐’고 맞받아치질 않나 쿠데타 대통령, 핵 폐수, 수산물 먹방, 괴담 양산 세력, 반국가 세력 등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말을 써야 국민들이 호응해 줄 거로 생각하는지 나날이 막말의 수위가 높아지더군요. 설마 누가 누가 더 자극적인 말을 잘 하나를 겨루려는 건 아니겠지요.
정치란 정당이라는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공익을 위해 얼마나 더 창의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하는가를 겨루고 결과를 선거라는 형태로 국민에게 평가받는 일입니다. 어느 정당이 권력을 쥐는가를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되도록 다투는 싸움이 아닙니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18세기 프랑스 논객인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말입니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과 얼추 같다는 말인데, 그러나 아무리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봐도 우리 국민이 저처럼 품격이 떨어진 정치 싸움 수준으로 어리석거나 품위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지 워싱턴은 비록 적이라도 남의 불행에 기뻐하지 말라, 저주와 모욕의 언사는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런 개개인을 대표하라고 선출한 정치인들이 이토록 품위가 없는 언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정치를 한다는 그들이 우리 국민의 수준을 그만큼 낮추어 보고 자기들 이익만 다투노라 국민의 살림살이는 안중에 없어도 된다는 걸까요?
품위나 품격은 사용하는 언어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비록 개인에게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품위있는 정치가 되기 위해서도 먼저 갖추어야 할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대척점에 서 있다 하여도 직설적인 언사로 공격하고 모욕하기보다 품격 있는 토론을 통해 이견의 타협점을 찾는 협치로 공익을 위한 비전을 만들어나가는 품위 있는 정치의 모습이 간절하게 기대되는 현 시점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말에 그보다 더 고약한 말로 대거리를 해서 눈에는 눈으로 맞서노라 정말 중요한 민생은 잊고 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말단의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는 대범함과 관대함 또한 품위 있는 정치에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잠시 머무는 여관이요 / 시간은 영원한 나그네라.(夫天地者 萬物之 逆旅 / 光陰者 百代之過客)’ 당나라 때의 시인 이태백(李太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첫 구절로 봄날 꽃핀 정원에서 여러 지인들과 시회(詩會)를 열며 기념하여 지은 시입니다. 학창 시절 배운 시이지만 그 속에 담긴 삶을 대하는 담대하고 호방함에 마음이 끌려 이 구절만은 쉬이 잊혀지지 않고 간간이 되새깁니다. 잠시 떠돌다가는 인생(浮生若夢)에 기쁨이라고 해서 얼마나 되겠느냐, 조물주가 빌려준 시‧공간과 거기서 맺는 관계를 소중히 여겨 아름다운 삶을 가치있게 꾸려보자고 나름대로 해석하며 티끌만한 것에 매달려 다른 사람과 아웅다웅 다투게 될 때,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입니다. 외람되지만, 한낱 지푸라기같은 까탈에만 집착하여 대범히 흘려보내지 못하고 ‘지금, 여기(now, here)’ 어떤 것이 더 가치 있고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놓치고 있는 작금의 우리가 감상해 봄 직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