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이런가. 유년 시절 추억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특히 외가에서 추억이 그렇다. 그곳에서 집안 대소사 때마다 대청마루에 앉아 맷돌질을 하던 이모 모습을 요즘도 잊을 수 없다. 연신 맷돌을 돌리는 이모 행동이 어린 눈에도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암 맷돌 아가리에 녹두, 콩 등 곡식을 우겨넣던 이모였다. 그럴 때마다 이것 옆구리로 삐져나오는 곱디고운 맷돌 밥이 퍽이나 신기했다. 이런 이모의 맷돌질을 언젠가는 재미삼아 따라해 보고 싶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에 머물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외할아버지 회갑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먼 곳에서 외가를 찾아온 친척들로 집안은 온통 북적거렸다. 외가를 찾은 근동 아낙네들마저 온갖 음식을 장만하느라 눈 코 뜰 겨를이 없었다. 마당가에선 머슴이 떡판을 떡메로 내리치고 있었다. 저만치 마루에선 맷돌질 하는 이모 모습이 필자 눈에 비쳤다. 이를 보자 한걸음에 대청마루로 달려갔다.    이모는 필자를 보자 대뜸 허리를 펴며, “ 이모 측간 좀 다녀올게.” 하며 자릴 떴다. 이때다 싶어 녹두를 한웅큼 손에 쥐어 맷돌 아가리에 우겨넣고 어처구니를 힘껏 돌려봤다. 무겁게만 생각했던 맷돌이 ‘사르르’ 가볍게 돌았다. 단단하던 녹두알이 순식간에 입자 고운 분가루처럼 화하기도 했다. 그것을 보자 철없는 생각에 ‘모래알도 이렇게 곱게 갈릴까?’ 싶었다. 얼른 마당으로 내려가 모래를 한줌 쥐고 이모 몰래 맷돌 아가리에 넣고 어처구니를 돌렸다. 역시 모래알도 곱게 갈려나왔다.   그 다음날 외할아버지 회갑 음식상은 엉망이 되었다. 모래알이 들어간 녹두 빈대떡 때문이었다. 이것을 먹던 많은 손님들은 하나같이 온갖 인상을 쓰며 입에 넣었던 녹두전을 뱉느라 정신없었다. 이 때 맷돌질을 한 이모만 애꿎게 외할머니께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 꾸중에 이모는 헛간으로 달려가 말없이 옷고름으로 눈물만 찍고 있었다. 어린 맘에도 이모가 흘리는 눈물이 필자에게 가해지는 회초리보다 더 무서웠다.   비밀은 탄로 나야 하기 때문에 비밀이 존재하나보다. 하지만 필자 비밀은 그 목숨 줄이 소 심줄 보다 더 질겼다. 지난날 이모를 울리게 한 비밀이 수십 여 년 동안 내 가슴 속에서 그 모습을 꼭꼭 숨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가슴 속에 묻었던 비밀이 자리할 공간을 잃었다. 양심이 얼마나 소중하고 인간을 어떻게 귀하게 만드는가를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뒤늦게라도 수십 년 전 그날 녹두 빈대떡에 모래를 갈아 넣은 장본인이 나였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이 사실을 이모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하나 이미 그분은 고인이 되었다. 하여 이제라도 이렇게 만천하에 필자 가슴에 오랫동안 지녀온 비밀을 발설할까 한다. 솔직히 고백하니 왠지 가슴이 한결 깃털처럼 가볍다.   비밀과 거짓은 같은 몸통이나 다름없다. 요즘 세상사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흑백을 가리지 못해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우리네 속담처럼 부엌에 가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옳고, 안방에 가서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맞는 성 싶다. 이번 후쿠시마 원자력 오염 수 방류 건을 놓고 우리나라를 방문한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자신은 오염수를 마실 수도 있고 수영도 할 수 있다는 말을 해 비난을 샀다. 도대체 이 말을 믿을 국민이 몇이나 될까?   어디 이뿐인가. 양평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전면 백지화 한 것을 놓고 여야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날선 공방에 국민들은 마냥 어느 쪽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취소되자 서로, “네 땅 때문이다. 내 땅은 상관없다.” 라는 식의 발뺌과 억지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이 바람에 십 수 년 넘게 주민 숙원 사업이었던 고속도로 건설 취소에 그곳 주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로시 말, 양평 고속도로 건설 취소에 따른 여야 정치인들의 말들을 상기하자 문득 맷돌이 떠오른다. 어린 날 보아온 맷돌은 아무리 단단한 곡식도, 심지어 모래알조차도 그 안에 들어가면 형체 없이 갈리곤 했다. 이로보아 거짓도 진실처럼 포장되거나 희석되면 그 진위 여부를 쉽사리 가릴 수 없다. 어느 소설가가 “비밀이 없는 자는 가난한 자”라고 했던가. 하지만 비밀은 분명 거짓과 일맥상통하기도 하잖은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 비밀일 경우 그 실체는 더욱 적나라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릇된 비밀은 오래 될수록 때론 그것에서 악취가 난다. 양심이 썩고 있어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