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안겨주는 불빛이 휘황한 현대다. 이 때 어린 날 추억을 불러들여 곱씹는 것은 진부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왠지 어린 날이 마냥 그립다. 초등학교 2학년, 경찰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잠시 시골 살 때 일이다. 당시 동네 대부분 집들은 초가 일색이었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서면 초가들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댄 채 살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나뭇가지나 흙담으로 지은 야트막한 울타리 너머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곤 했다. 이 뿐 만이 아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풍경은 매우 정겨웠다. 마당가엔 모깃불의 매콤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멍석 위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저녁밥을 먹기도 했다.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고 친구 집에 마실을 가곤 했다. 이 때 삽짝문을 밀치기 전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한껏 뺀 채 친구 이름을 부르곤 하였다. 먹거리가 귀하던 그 시절이었다.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일명 당원을 넣어 반죽하여 가마솥에 찐 술빵이나, 아님 시루 떡,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부침개를 부쳐 이웃과 나눠먹을 때도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였다. 현대엔 좀체 찾아 볼 수 없는 인정스런 모습이다.
  도심지 회색빛 촌에 갇혀 살며 묵직한 철문만 닫으면 이웃과는 단절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잖은가. 더구나 건축 양식 발달로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울타리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없다. 그러나 필자 어린 시절만 하여도 참나무가지, 소나무 가지, 싸리나무 가지 등으로 엮어서 울타리를 만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초가엔 나무 울타리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즉 운치가 있다고나 할까.
 
나무 울타리는 여러 나뭇가지를 사람 키만큼 자르고 밑둥은 땅속에 묻어 고정 시키곤 했다. 튼튼한 통나무를 가로대로 대어서 울타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 시켰다. 어찌 보면 엉성한 울타리다. 도둑이나 외부인 출입을 막아보자는 심사보다는 초가만 덩그렇게 지어놓으면 왠지 허전하여 이렇듯 나뭇가지로나마 울타리를 쳐놓은 듯하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나무 울타리 , 토담, 돌담 가리지 않고 이 울타리를 거주하는 집만큼 소중히 여겼다. 심지어는 정신적 지주로까지 추앙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딸만 낳은 집안에 사내아기가 태어나면 한 집안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태어났다고 기뻐 할 정도였으니…. 농경시대에 남자는 힘의 상징이었기에 그랬을 법 하다. 물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것도‘남자는 힘이 세다’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지 싶다. 양성시대가 도래 했고, 사회 각계각층에 여풍이 불어온 현대에 비쳐보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지는 구태의연한 사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긴 무거운 택배 상자를 거뜬히 들어 올리는 것만 살펴봐도 이럴 땐 남자의 힘은 참으로 유용하다. 이에 반하여 요즘 엉뚱하게 과시하는 남자 힘이 강력하다 못해 위험한 게 문제다. 이즈막 걸핏하면 여자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곤 한다. 여자 몸에 주먹질을 할 곳이 어디 있나. 그야말로 남자가 주먹으로 한 대만 때려도 추풍낙엽처럼 한 방에 날아갈 여인 몸이다. 집 앞에서 혹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정사정없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 이야기는 여성 신변을 불안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힘자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성들에게 안전지대는 어디란 말인가. 보호받을 수 있을 장소라고 안심한 집 앞, 혹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조차 남성이 행한 폭력과 성폭력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잖은가.
세상 절반은 남성이고 여성이다. 남녀 상호보족작용으로 이 사회는 이루어지고 있잖은가. 남녀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줘야 한다면 공자 왈 같은 말만은 아닐 것이다. 문득 옛날 인심이 그립다. 나뭇가지로 허술하게 만든 울타리 안에 살아도 그 시절엔 여성에게 다가와 난데없이 폭력 휘두르고 성폭력을 일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