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축제’라는 오차숙 수필가의 성 에세이가 있다. 이 책자를 다시금 펼쳐본다. 작품 편 편마다 남녀 성에 대한 내용을 밀도 있게 꾸려서 매우 흥미진진하다. 사실 여성이 성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대담성을 요구한다. 적어도 여성이 성에 대한 은밀성을 속속들이 까발리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면 필자만의 편견일까. 성이 이미 외국처럼 개방되어 남녀 간 혼전 성관계는 물론 혼외정사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이즈막이다. 그렇지만 성에 대한 이야기는 터놓고 말하기엔 민망스러워 왠지 거북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오차숙 수필가처럼 성에 대한 이야기를 과감히 꺼내고자 함은 몇 해 전 우연히 시청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남성들은 유독 자신의 정력에 신경을 많이 쏟는다. 정력에 좋다면 겨울잠 자는 개구리는 물론, 개고기, 생 뱀을 날로 먹는 것은 예사이다. 
 
그 탓인지 재료야 어찌됐든 정력에 좋은 음식이나 물건이 있다면 천리만리 먼 길 마다않고 외국까지 달려가 기어코 손아귀에 넣고 마는 게 남성들 속성이라면 지나치려나. 이를 겨냥한 듯 섹스 시간을 5배로 늘려준다는 ‘변강쇠 콘돔’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안방의 힘 자랑(?)에 여념 없는 남성들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남성들이 인간 삶의 원동력이라는 성에 대해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데야 할 말은 없다. 문제는 그 힘을 아무 곳에서나 자랑을 하는데에 있다. 성폭력, 성희롱이 그것이다. 이도 모자라는가보다. 국내가 아닌 외국까지 가서 함부로 몸을 놀려 한국인의 핏줄을 퍼뜨리고는 ‘나 몰라라’ 하는 게 그것이다. 이런 행위로 인하여 비록 외국 여성들이지만 한 여성의 삶을 나락으로 몰고 간 내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곤 왠지 마음이 아팠다. 한국 남자들이 비록 외국이지만 그곳 여인들 가슴에 대못까지 치고 있으니 같은 여성으로서 안타까움과 측은지심마저 일어서다. 한편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이 존재했었는지, 아니면 본능이 앞섰는지는 묻고 싶지 않다. 적어도 별다른 사랑 없이 본능에 의해 여성의 육체까지 범했다면 그에 따른 사후 조치를 철저히 했어야 원칙 아닌가.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 핏줄을 상대 여성에게 잉태케 했으면 지아비로서 이전에 아이 아버지로서 책임은 졌어야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헌데 자신의 욕망만 채우기 급급해 외국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가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말았다. 이런 인면수심이 아이만 임신 시켜놓고 한국으로 줄행랑을 놓게 한 원인이 아니던가.
  필리핀 만해도 그곳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인 남성 아이를 낳아 기르는 그곳 여성들 다수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었다. 어느 필리핀 여성은 한국에 딸만 낳은 가정이 있는 남성과 얼마간 동거하며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허나 아무런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 남성은 한국으로 돌아갔단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 여성이 사는 집은 필리핀 어느 빈민가였다. 물고기를 잡아 두 아들과 생계를 잇는다고 했다. 헌데 하루 벌이가 우리나라 돈으로 몇 천원에 불과 하다고 한다. 그나마 물고기도 요즘은 잘 안 잡혀 어린 자식들과 먹을 양식도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두 아들이 자신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일이란다. 자신은 잊어도 자식들만은 잊지 말아달라며 그녀는 눈가에 눈물을 훔쳤다.
외국 여성이나 우리나라 여성이나 사랑에 대한 감정은 같으리라고 본다. 그 여성은 한국 남성을 사랑했기에 아이까지 임신했잖은가. 자신의 핏줄에 연연하기로 소문난 우리나라 남성들 아닌가. 더구나 아들을 낳으면 천하를 얻은 듯 기뻐하는 한국 남성들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외국 여성과 낳은 아이는 그토록 외면 한단 말인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국에 가서 그곳 여성들과 사랑을 나눌 형편에 처한 남성이라면 5배의 힘을 안겨준다는 ‘변강쇠 콘돔’이라도 준비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것만이 국제적으로 한국 남성들 위신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이모저모로 미연에 방지 하는 일일 것 같아 그것마저 매우 요긴하게 여겨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