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지난 6월 14일(수) 11시에 경주유림회관에서 향유 100여명이 모여 북산서사를 서원으로 승격하는데 대한 사림공의(士林公議)를 묻는 모임이 있었다. 북산서사는 경주시 호명리에 소재하는 서사이다. 이 서사는 조선조 중종 30년(1535년, 을미) 9월에 거행된 과거 별시에서 27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한 호계 이을규(李乙奎) 선생의 보국위민한 정사와 학덕을 기리기 위한 교화와 제향의 공간으로 긍구(肯構)한 서사이다.   호계 이(李) 선생은 23세에 국자사마 진사과에 입격하고, 이듬에 옥산 계정에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성의’와 ‘정심’에 대한 강의를 듣고 각성한 바 있어, 솔권하여 중리에서 호명리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곳에 호계서당을 지어 거주하며 학문에 정진하면서 항시 회재선생을 찾아 묻고 배웠다. 계정의 뒤쪽 정혜사에서 면학 정진하여 대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권지교서부정자로 출사하여 승문원교리, 경산현감 등을 역임하고 특히 초계군수로 도임하여서는 십 수 년 동안 풀지 못한 민원 난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여 향민들이 선생의 밝은 지혜에 감복해서 도처에 송덕비를 새워 숭앙하였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세 차례 명나라 사신으로 발탁되어서 다녀왔다. 그때 명나라 황재는 현로를 가상하게 여겨 금로(金爐) 1쌍을 하사 하였으나, 사신으로 인해 얻은 병환을 쾌유치 못하고 39세의 아까운 연치로 사세하고 말았다. 천불가지 귀부지(天不可知鬼不知)한 너무나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주인으로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는 충암 김귀일을 비롯하여 모두 76인으로 알려져 오고 있으며, 그 중 장원급제자는 노암 김종일, 호계 이을규, 질암 최 벽 등 3인이다. 이 현조(顯祖)들은 관운이 여의치 못하여 일찍이 귀한(歸閈)하거나 종생 하여 안타깝게도 우수한 지혜를 더 이상 발휘하지 못했다.   경주에는 문과 급제만이 아니라 효자, 충신, 열려 등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사당과 재실을 지어 향사를 받들어 오고 있음은 현조의 덕의를 숭모하고 현창하려는 자손들의 위손지심과 향민들의 추앙지심이라 할 것이며, 이는 인간이 지닌 여러 가지 마음 가운데 가장 기본이고 순수한 보본지심이라 생각된다. 그 현표(顯表)로써 묘비, 사적비, 신도비를 세우고, 묘전, 묘우, 사당, 영당, 서원, 정사, 서당, 서사, 재실, 정자 등을 긍구하여 현조의 사회적 덕의와 충렬을 숭앙하며 추모의 공간을 갖는 것은 후손과 향유들의 위선적 도리만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을 지킨 절의를 후세에 기리 전하려는 생의 본질적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온당한 삶을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의 문하에서 고매한 인격적 수양과 인간화의 교육을 받아야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무엇이 대의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인 자아의 성찰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현들 중에는 극진한 효열로써 부모와 지아비를 섬기고, 나라가 위란할 때는 서사토적을 다짐하고 구국위민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환로에 나가가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들로 부터 추앙을 받은 현조가 많다.   특히 서원은 조선 시대에 선비가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이나 충절로 사세한 사람을 봉향하는 공간으로 교화와 제향의 사립 공간이며, 오늘날 중등학교에 비교되는 교육기관이다.   유학 성현의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으로써 묘우와 동무, 서무, 내삼문이 있고, 유생들에게 강학을 실시하던 강당이 있으며, 또한 유생들의 기식공간인 동재, 서재 등이 있다. 이런 서원에 조상을 모시는 것은 가문과 향중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조상이 그런 추원의 대상이 될지라도 자손들이 불출하면 그 덕의를 현창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의 경주이씨호계공문중에서 북산서사를 북산서원으로 승격 게판(揭板)하려는 위선사는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북산서사가 구비한 강학과 제향의 공간에서 볼 때 서원으로 승격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사량(思量) 된다. 그것은 호계 이을규 선생은 장원급제한 학문적 수재이며, 퇴임 후에는 호계서사를 지어 “현면여운도의중(軒冕如雲道義重)하니, 지구심득불구지(只求心得不求知)하라. 즉 벼슬은 뜬 구름 같고 도의는 귀중하니, 마음을 구하지 지식만 구하지 말게.” 라는 스승인 회재선생의 말씀을 명심하며 오로지 후진양성과 위기지학에 열중한 석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 재직 시에는 정사를 바르게 펴서 향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보국 애민한 관료였기 때문이다. 서원승격에 동의한 향내⦁외 사림과 주선한 경주이씨호계공문중의 위선사에 깊은 감명을 느끼며 따뜻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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