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光復節,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10월 1일 이를 국경일(공휴일)로 법제화함으로써 매년 양력 8월 15일이 되면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광복절 기념일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넋을 기리게 된다. 역사적 시기마다 우리 독립운동은 그 성격과 시대적 사명을 달리하며 진행되어온 역동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으로 희생된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독립운동은 3·1 독립선언과 상해 임시정부 헌장, 그리고 매헌 윤봉길 선생의 독립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모든 국민이 함께 힘써온 독립운동은 1945년 8월 15일 이 날, 광복의 결실을 이뤄냈다.  조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던 캄캄한 일제 강점기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국내외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신 애국지사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 무장 독립운동가를 길러내신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경북지방에는 독립 운동계를 지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이 대표적이다. 석주 선생은 시종 의병 전쟁으로부터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그의 선각적인 투쟁에는 가족, 일가, 친족이 함께했다. 이상룡 선생은 안동전통 명가의 종손이다. 이상룡 선생의 독립운동이 알려지자 일제의 보복은 참혹했다. 1930년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가는 철도 노선을 석주 선생의 생가이며,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임청각을 관통하도록 놓았다. 당시 행랑채와 부속 건물 50칸이 뜯기어 훼손했다.  경주 내남면 노곡리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내며 활발히 애국 활동을 펼친 '고헌 박상진 의사'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광복절이 다가오자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긴 고헌 박상진 의사는 신라 시조 왕 박혁거세 후손으로 태어난 곳은 울산이지만, 네 살 때 경주 외동읍 녹동리로 이주했다. 경주 최부자 댁과 혼인을 하게 되어 안팎으로 경주 사람 박상진 의사가 이룬 업적을 기리고 있다.  고헌 박상진 의사는 1913년부터 조선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해 총사령으로 추대됐다. 당시 대한광복회 부사령(초대 이진룡, 2대 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 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영향으로 함께 활동하던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후 일제의 세금강탈(효현교, 세금 마차 탈취 등)과 금광 습격, 친일부호와 조선 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4년여의 옥고 끝에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런데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8·15 광복절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기념행사를 하고 국민들은 태극기를 달아 경축했으나 언제부터인가 광복절에 태극기가 없다. 대단지 아파트에 광복절 경축 태극기를 게양한 가구는 몇몇 가구에 불과하다. 광복절이 해가 거듭될수록 퇴색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올해 광복절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부심을 회복하고 애국심을 다시 다독이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1948년 8월 15일은 '한반도상의 유일 합법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독립'을 이룩한 날이라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따른다면, 대한민국은 금년 8월 15일을 '제78회 해방 기념일'인 동시에 '제75회 독립기념일'로 기념해야 마땅하다. 물론 분단된 상황에서 절반의 광복이라는 견해도 있다. 태극기를 달아 경축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광복절'을 기념하는 날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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