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울어 젖히는 매미 소리마저 귀에 거슬린다. 아무리 마음 자락을 여유롭게 지니려고 애써도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짜증을 다스릴 길 없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샤워를 하고, 얼음물을 마셔도 더위는 좀체 가시지 않는다. 에어컨 바람도 자주 쐬니 머리가 아프고 냉방병까지 생길 정도다.   이렇듯 올 여름 폭염 및 폭우에 시달리노라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상 이변이 이제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폭염, 폭우, 가뭄, 해일, 남극 빙하 해빙 등 기후가 보이는 불길한 징조는, 삶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잖은가. 폭염 및, 폭우를 겪자 그동안 무수히 환경을 훼손해 온듯하여 손이 절로 가슴으로 간다. 걸핏하면 멀쩡한 산을 허물고 건물을 짓곤 했잖은가. 환경보호는 벌써 오래 전부터 주창돼 왔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기후 변화 역시 수 십 여 년 전부터 예견해 온 일들이었다. 오죽하면 필자가 지으려는 전원주택 설계도를 담당한 어느 건축사는 집 안에 수영장을 필히 갖춰야 향후 닥쳐올 여름을 견딜 만 할 것이라는 조언까지 하였을까.  그동안 폭염에 시달리노라니 학창시절 소극장에서 관람했던 연극 제목이 문득 떠오른다. '당신은 날씨 따라 마음이 변하나요?'가 그것이다. 어쩌면 이 연극 제목이 요즘 더위에 시달리는 필자의 감정기복을 정확히 알아맞힌 셈이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폭염에 시달려서인지 평상심을 잃기 예사다.   젊은 날엔 유독 사계절 중 여름철을 선호했다. 여름만 돌아오면 산과 바다로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데 혈안이 됐었다. 아름다운 추억은 쌓일수록 좋다고 했던가. 송추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친구들과 지냈던 하룻밤은 매우 낭만적이었다. 그때는 삼복더위에도 더운 줄도 몰랐다. 어디 이뿐인가. 바닷가 해수욕장에서의 물놀이는 아직도 그 추억이 엊그제 일처럼 눈앞에 선명하다. 여행을 좋아하고 유독 풍류를 즐겨온 젊은 날이었다. 이 탓인지 그 시절엔 해마다 새해를 맞으면 여름철만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그러나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계절이 안겨주는 희열 따윈 만끽할 겨를이 없다. 특히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연일 무더위가 지속되는 이즈막엔 하루빨리 여름이 물러가기만을 바람 할 뿐이다. 가슴이 그만큼 무미건조해져서인가 보다.  더위 이야기를 하노라니 14세기 영국의 계절 호칭이 뇌리를 스친다. 당시 영국에선 여름, 겨울 이렇게 두 개의 철로만 나누었다. 봄(sprng)이란 말은 16세기부터 생겨났다. 가을(autumn)의 유래는 설화집 '캔터베리 이야기'를 지은 14세기 잉글랜드 시인이자 관료이었던 제프리 초서에 의해서다.   요즘처럼 더위가 오래 끄는 것을 흔히 '주저하는 여름', '노처老妻의 여름'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늦더위를 두고 껄끄러운 관계인 장모로 빗대었다. 이것으로 미뤄봐 그곳에선 장모와 사위 사이가 썩 좋지 않은가 보다. 이규태 글 '늦더위'의 표현대로 장모에 붙는 형용사만 살펴봐도 어느 정도인지 짐작 할만하다. '사나운 장모', '오만한 장모','심술쟁이 장모' 등 대체로 그 나라에선 장모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 시각이란다.  우린 어떤가. 예로부터 가장 아끼던 씨암탉까지 잡아 고아 줄만큼 사위라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환영하잖은가. 자연 이렇다보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상대적이므로 사위도 장모의 아낌없는 사랑에 감복, 처가라면 말뚝에 대고도 절을 할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다.  반면 미국은 여권女權이 세어서인지 아님, 아내 - 장모의 권력이 집안에서 강해져서인지 지긋지긋한 지옥염천地獄炎天마저 장모에게 비유 하고 있다. '늙은 장모의 여름'이 그것이다. 자식이든 타인이든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장 그르치기 쉬운 요건은 다름 아닌 이기심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배신背信 역시 오롯이 그릇된 마음 탓이다. 눈앞의 소소한 이익 앞에 상대방에게 등 돌리고, 철석같은 약속도 헌신짝 버리듯 저버리는 것도 오로지 욕심 에 의해서일 것이다.  이로 보아 사위에게 미움 받는 미국 장모나 며느리와 관계가 안 좋은 우리네 시부모나 따지고 보면 상대방에게 받으려고만 하고 베푸는 데엔 인색해서가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 심리 재단을 해본다. 세상엔 당연한 게 없잖은가. 서로 주고받는 정이 인간관계에선 윤활유 역할을 하고도 남음 있다.  필자에겐 미혼인 세 딸이 있다. 훗날 사위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장모가 되기 위하여 지금부터 챙길 일이 무엇인가 고뇌해 보련다. 사위도 자식이다. 평소 친 아들처럼 아끼고 보살핀다면 이렇듯 폭염이 아무리 괴롭혀도 설마, " 꼭 장모같이 힘들게 하는 날씨네" 이런 소린 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필자도 사람인지라 앞날은 장담 못한다. 아마도 사위가 몹시 서운하게 대한다면 그야말로 '주저하는 여름' 정도의 장모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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