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조기교육으로 천자문을 종조부님으로부터 배웠다. 할아버지가 직접 가르쳐도 될 터인데 종조부의 가르침을 받도록 한 것은 당시는 느끼지 못했지만 특별한 애손지심(愛孫之心)에서라 생각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언덕길을 300미터쯤 걸어서 종조님 계시는 사랑방 앞에 문하배(門下拜)를 하고 방에 들어가서 “밤새 편안히 주무셨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린 다음 꿇어앉으면 종조부께서도 “잘 잤느냐?”하고 인자하게 맞아 주셨다.
  어제 배운 내용을 먼저 외우고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전에 매번 전시학습내용의 인지 정도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하루에 새로운 문장 여덟 자의 자의(字意)와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가 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당일 배운 것을 확인하고 이해 부족한 부분은 다시 보충해서 가르쳐 주셨다.
  그 문장 가운데 ‘충즉진명(忠則盡命) 효당갈력(孝當竭力)’을 특별히 강조하셨기에 지금도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충(忠)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고 효(孝)는 부모님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것‘이라 하여 충과 효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셨다. 
 
그래서 임진란을 당하여 선비들이 먼저 창의해서 누란(累卵)의 위기(危機)에 처한 나라와 향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중한 목숨을 홍모(鴻毛)와 같이 버린 것은 교육의 결과가 아닐까. 
 
또한 효를 ’백행지원(孝百行之源也)‘ 즉, 인간의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라 가르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문장은 항간에 회자(膾炙)되는 평범한 내용이지만 그 행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타 문중의 고보(古譜)를 보다가 경주김씨 석길문중 선대 효자의 이야기가 너무나 감동을 주기에 효자 김인학(金仁學, 1826~1894) 정려비에 명각(銘刻)된 효행 사적을 다시 전해 본다.
  이 효자는 날마다 땔감을 짊어지고 시장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구했는데, 하루는 부자가 함께 소를 몰고 성내(城內)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귀가하게 되었다. 산 소개를 넘는데 큰 범이 길을 막고 으르렁거리며 아버지께 달려들었다. 이것을 본 공이 앞으로 나아가 “너는 산군(山君)이니 부자의 정을 알 것이다. 나의 아버지를 해치지 말고 내 몸으로 대신하거라” 꾸짖으며 호랑이를 잡고 때리고 구르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를 구하니 어찌 일편단심 효성의 밝음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살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이는 출천지효(出天之孝)가 아니겠는가. 이때 몰고 간 암소는 주인이 해를 당함을 보고 노호(怒號)하며 달려들어 가 뿔로 받고 발로 차서 마침내 호랑이를 물리치고는 집으로 달려와 방황하며 슬프게 우니, 놀란 집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우르르 나왔다. 소가 온 길을 다시 되돌아 달려가기에 따라가 보니 부친은 다친 데가 없었으나 공은 해를 입었다.
  이 사실을 사림(士林)에서 감동하여 나라에 알리니 임금님도 감동하시어 정려(旌閭) 표창하고 소에게도 먹이를 상으로 내렸다. 이 효자는 갈력(竭力)을 넘어 진명(盡命)의 효(孝)를 보여준 것이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살신성효(殺身成孝)한 효행이 동물인 소에게까지 감동을 주게 되었으니, 이 어찌 영세불망의 효자가 아니겠는가. 정려(旌閭)는 만고(萬古)에 우뚝하게 빛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