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동안거를 들인 앞마당처럼 고요하다. 예사롭지 않은 불상이 있다는 마을이다.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들었을 삼거리에 섰다. 덩치 큰 나무 두 그루가 낯선 객을 반긴다. 마을 사람들의 삶을 내려다보며 안위를 지켜온 수호목이 늠름하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초입부터 가파르다. 옛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려고 수없이 오르내렸을 길이다. 이정표도 없으니, 갈래 길을 두고 마음으로 점친 오솔길로 몸을 돌린다. 이대로 올라가면 과연 땅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불상을 만날 수 있을지. 들인 숨을 후 욱 내뿜는다. 호흡을 가다듬지만, 잘게 부서지기가 일쑤다. 무심한 허공이 거친 숨소리를 삼킨다.
산언덕에 접어들었건만 아직도 가파르다. 이정표 하나 없는 산길에서 두리번거리자니 허공을 가르며 몰려오던 찬바람 한 줄기가 이방인의 머리칼을 흔들어놓고는 대숲으로 들어간다. 댓잎이 ‘사사 사 삭’ 차례대로 아우성친다. 적막을 깨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린다. 멀리 겹겹으로 둘러친 산등성이가 말간 하늘 아래 산수화 한 폭을 펼치느라 바쁘다. 그 앞으로 소박한 마을 지붕이 나란히 또는 비끼어 햇살을 받느라 정답다. 꽤 오래되었을 법한 기와집 한 채가 산그림자를 베고 누웠다.
가파른 길에서 나무 기둥을 층층이 끼워놓은 계단이 허연 웃음을 짓고 내려다본다. 옳거니, 저 길 따라가면 되겠구나 싶다. 산길에서 만난 길잡이인지라 더없이 반갑다. 보이지 않는 공덕에 합장하고 지그재그 비탈길을 딛고 끝자락에 오른다.아담한 전각 앞쪽에 널브러진 마른풀이 낮은 봉분 여럿을 덮고 있어 언뜻 보면 그저 황량한 들판이다. 솔향 풍기는 산사 앞에 비석도 없이 차디찬 바닥에 누운 봉분의 주인들이 궁금하다. 부처님과 어떤 귀한 연고이기에 법당을 마주하고 있을까. 옛사람들의 대답을 들을 길 없으니,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발길을 옮긴다.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비로자나불에 전설이 따른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노인이 심상찮은 꿈을 꾸고 산에 올랐다가 흙 속에 엎드린 불상을 발견했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고통스럽게 삶을 잇던 사람들은 부처님을 희망과 위안으로 삼고자 당집을 지어 마을 신으로 모셨다. 후세에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좌상으로 확인되어 보물 1121호로 지정되었다.
하늘과 맞닿은 전각 앞, 세월을 입은 허름한 나무 쪽문이 옥을 두른 듯 짙푸르다. 비탈진 길을 오르고 올라와 마주할 부처님이 궁금하다. 키 작은 쪽문에 매달린 빛바랜 쇠고리를 조심스레 잡아당긴다. 봉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대좌에 앉은 석불에 창살 그림자를 드리운다.
 
순간, 만감이 엇갈린다. 근엄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띤 비로자나 부처님을 연상했건만, 두 눈은 긁히고 파내어져 움푹하다. 코와 입은 형체도 없다. 침묵으로 선정을 수행하는 부처님이라지만, 생불이라면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웠을 일이다. 삼배를 올리고 석불을 올려다본다. 누가, 무엇이 그토록 간절했기에 법신을 저리 처참하게 깨뜨렸는가.
다가가서 두 손으로 부처님의 볼과 깎이고 문드러진 곳을 매만진다. 거칠고 차다. 깊게 패어버린 두 눈은 크기가 달라 찡그린 듯 고통스러워 보인다. 깎여질 때마다 부처님의 호통은 없었을까. 그들에게 벌하지는 않았을까. 침묵으로 앉아계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을 비집고 상상의 걸음이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삶이 몹시 비탈졌다. 창과 괭이를 둘러매고 전쟁터로 나간 백성들이 팔다리를 잃고 처참하게 울부짖는다. 들끓는 분노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 밤낮으로 꺽꺽대며 골짜기를 메운다. 칭얼댈 힘도 없는 어린 자식 입에 약 한 첩 넣어주지 못한 어미의 한숨이 이끼 낀 장독 위에 쌓인다. 궁핍한 삶이 마을마다 아우성친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심을 위로해 줄 이 없으니, 백성들 스스로 구원의 길을 나선다.
혼란해진 민심을 해결하지 못한 나라님의 심정인들 오죽하랴. 식량이 부족하고 행정이 마비된 현실 속에서 속수무책인 고을 원님들도 한탄하며 주저앉는다. 고난의 시기에 백성들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선다. 민초들의 궁핍한 삶이 마을마다 아우성친다. 민심마저 분열된 처참한 지경에 그들에게 나라의 안위가 당장 한 끼 밥을 해결하는 일보다 더 급하기나 하겠는가.사람들이 비탈길을 오른다. 신성한 불상을 가져가면 간절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그들만의 신념이 돌덩이만큼이나 단단하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비로자나 부처님 앞으로 저마다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산길을 오른다. 법당으로 가는 길이 비탈졌지만, 질곡의 삶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민초들의 통한이 언덕마다 응어리져 맺힌다.한 남정네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불상에 매달린다. 남루한 무명 저고리를 입은 아낙네도 부처님의 입을 긁는다. 떡두꺼비 손자 볼 욕심에 며느리를 앞세워 삼경에 올라와 길게 내려진 부처님의 귓불을 갈아내는 여인들이다. 법당 밖 대숲에는 눈만 빼꼼히 드러낸 이들이 둘러앉아 허겁지겁 돌가루를 입속에 털어 넣는다. 부처님의 귀와 손이 나날이 깎이고 눈은 찡그린다.기복의 힘이 있다고 믿은 그들이기에 하루가 힘겨운 현실을 부처님의 기운으로 극복할 거라 믿고 싶었다. 아니, 그리 믿었다. 가난한 백성도 저들의 행위가 죄짓는 일임을 모를 리 없어 이슥한 밤중에 비탈진 길을 오르내렸다.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 가진 것 없는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아담한 전각 밖에 바람이 인다. 댓잎 부딪는 소리가 각다분한 현실에서 안간힘을 쓰며 이겨내려 했던 옛사람들의 애절한 절규 같다. 불확실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등불을 켜고자 했던 간절한 소리다. 그들이 걸어온 가파른 삶과 오랜 세월 시련을 겪어 일그러진 비로자나 불상의 모습이 눈앞에 겹친다.전각 안에 머물던 햇살이 자리를 바꾼다. 문을 열자 확 트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앞 들판에 이름 없는 봉분들이 숨죽인다. 용서라도 구하는 듯 엎드려 있다. 돌아보니 법계와 중생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비로자나 불상이 오랜 침묵을 깨고 대좌 위에 앉아 대중과 오래된 봉분을 향해 묻는다. “지금 그대들의 삶은 평탄한가?” “그대들은 소원을 이루었느냐?”마른풀을 뒤집어쓴 채 인생의 영원한 잠을 자던 이들이 부처님 앞에 납작 엎드려 뉘우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이 봉분 숲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