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葬書)에 이르기를,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생기를 타기 위함이다 하였으니 장사를 지낼 때는 땅속에 기운이 많이 모여 있는 곳(명당)에 시신을 안장해야 발복이 원활하다는 것이다. 지상에는 천기가 있고 지하에는 지기가 있다.    이러한 지기가 많이 흐르고 있는 땅속의 깊이를 일률적으로 정할 순 없지만 일반적으로 보아 지표면으로부터 1~2m정도 밑에서 많은 지기가 흐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보면 장사를 지낼 때 천광의 깊이를 상투 끝이 보일락 말락 할 때까지 파라고 되어있다.    그러니 사람이 서 있을 때의 키 높이 정도다. 그런데 이와 달리 지기가 땅의 표면 가까이로 흐르는 특별한 장소가 있는데 이러한 곳에 장(葬)하는 것을 배토장(培土葬)이라 한다. 이러한 곳은 땅을 깊이 파지 않고 표피만 걷어 낸 후 그 위에 관을 놓고 흙을 북돋우어 봉분을 만들어야 장사의 목적인 생기를 탈 수 있다.   조선 정조 때 배토장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어 적어본다. 경기도 여주 땅에 살림이 너무나 어려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동냥으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있었다.    이 집안의 아들은 효심이 지극하여 나이 드신 부모를 봉양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던 중 어느 해 겨울 아들은 다 쓰러져가는 움막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지만 엄동설한에 부모는 잠을 자다 얼어 죽게 된다. 아들은 부모의 죽음을 애달파 하며 집 근처 제일 양지바른 곳에 묻기로 하고 혼자서 땅을 파는데 겨울이라 땅바닥이 얼어 깊이 팔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조금만 파고 그 얕은 곳에 부모의 시신을 묻어 봉분을 만들었다.   그런데 묘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눈이 내리는 어느 날 어떤 여인이 움막을 찾아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길을 갈 수가 없으니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방이라곤 하나밖에 없고 더구나 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여인이 묵기에는 자신의 움막이 너무 초라하여 처음엔 거절하였으나 계속적인 요청으로 그 여인을 받아들였다. 해는 저물고 이불도 하나밖에 없는 움막 속의 단칸방이라 하는 수없이 그 여인과 동침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여인은 원래 정승의 딸이었지만 아버지가 병환으로 죽자 계모의 학대로 집을 나와 갈 곳이 없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닌 패물을 팔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며 함께 살기를 희망하였다. 이게 왠 횡재인가. 가난한 아들은 정승의 딸을 아내로 맞고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장사가 잘되어 훗날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늘 부모의 시신을 너무 얕게 묻어 잘못 모셨다는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부모 묘를 다시 파서 더 깊게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그런 후 이상하게도 그렇게 잘 되던 장사가 잘되질 않았다. 이웃에 사는 풍수 지관이 말하기를 이 묘 자리는 배토장으로 얕게 땅을 파고 묘를 써야 발복을 하는 자리라며 원래대로 얕게 묻을 것을 알려주었다. 이들 부부는 다시 원래대로 부모님을 얕게 파묻고 장사가 잘되어 평생 부자로 살았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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