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심장 루브르 박물관. 매년 전세계에서 가볼 만한 곳 일 순위로 꼽힌다. 예술의 심장이기도 한 이곳을 한국의 전통공예 작품이 매혹시킨다. 10월 16~17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프랑스 파리올림픽 12개국 초청 전시’ 행사가 진행된다. 프리뷰 전시회가 지난 8월 KBS대구 갤러리에서 열렸다. 나는 파리에 가지 않고도 작품을 감상하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 그중 황병필 작가의 캘리그래피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칸 국제광고제 파이널리스트를 수상한 아트 디렉터이기도 하다. 동시대 감성과 호흡하는 그의 작품을 자세히 소개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글씨를 그린다 그림을 쓴다’황병필 작가는 일명 ‘히어로그라피(herography)’로 유명하다. 히어로(hero), 캘리그래피(calligraphy)를 합친 말. 처음부터 끝까지 명언이나 노래 가사 구절로만 이루어진다. 2019년 저작권, 디자인권을 획득한 독창적인 기법이다.   영웅, 한류스타 등 우리 일상을 빛내거나 역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 주인공. BTS, 이순신 장군, 윤봉길 의사, 백범 김구, 임영웅, 오드리 헵번이 대표적이다. 평범한 소시민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도 당신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 히어로그라피의 주인공도 될 수 있단 얘기.   작가는 ‘글씨를 그린다 그림을 쓴다’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글씨와 그림은 구분되지 않는다. 먹의 농담과 날림을 조절하며 선과 형태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언뜻 보면 배경, 머리카락 같은 얼굴 주변만 글씨로 그린 것처럼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얼굴의 눈, 코, 입 모두 글씨로 뒤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로 그린 BTS 지민의 눈과 코<봄날>이 좋은 예. 한류스타 BTS(방탄소년단)의 노래 ‘봄날’의 가사를 그렸다. 섬세한 얼굴선을 따라 가사가 부드럽게 출렁인다. 자모음의 가로세로선, 직선과 곡선 배치가 신묘하다. 작가는 한글로 그리면 독창적이고 사랑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깊은 감정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그런데 얼굴에 써보니 가사와 글씨가 그림으로 보이더라는 것. 실제로 봤을 때 그랬다. 한글은 글자마다 뜻을 담고 있어서 글자만으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자모음 형태의 변형도 자유로운 편이다. 영어는 어떨까. 알파벳 각각은 의미를 담지 못한다. 자유로운 변형이 어려워 그림 꾸며주는 용도에 그친다.   예를 들면 ‘봄날’ 가사 중 ‘다’ 한 글자로 BTS 멤버 지민의 눈과 코를 그렸다. ‘ㄷ’은 눈과 광대를 소복이 감싸고 ‘ㅏ’는 쭉 뻗은 콧날을 따라간다. 얼굴에 드러나는 인물의 감성과 글씨의 느낌이 풍성히 살아난다. 나는 홀린 듯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글씨와 그림, 가사와 얼굴(사람), 한글과 예술이 연결되는 매혹적인 광경.   <독립선언서>는 또 어떤가. 모티프는 1945년 11월 3일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임시정부 요인들이 충칭 임시정부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을 보면 농담이 일정하지 않다.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다.   작가는 사진이 지닌 농담까지 재현했다. 글자를 넘어 글자에 담긴 역사를 되살리기 위함. 그렇다 <독립선언서>는 글자가 아닌 역사다. 독립 향한 절규를 글자로 그린 역사적 장면. 이번 루브르에는 <봄날>, <독립선언서>가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다. 칸 광고제 사로잡은 동시대 감성황병필 작가의 이력이 무척 재미있다. 캘리그래피 작업과 광고 홍보 아트 디렉터 활동을 병행해왔다. 배달의민족 지면 광고가 그의 손길을 거쳤다.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 <극한직업>을 패러디한 광고. 음식 배달을 ‘딜리버리 활극’이라 표현했다. 국내 최고 권위 광고상인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2014년 인쇄 부분 대상을 받았다. 광고계의 칸 영화제라 불리는 칸 국제광고제 파이널리스트도 수상했다. 2012년 BMW 미니 자동차의 지면 광고 출품. 잡지 지면에서 미니 자동차를 오려내 다른 페이지에 넣어두었다. 헤드카피는 ‘mini is gone(망설이는 사이 미니를 가져갔다)’. 누가 가져가기 전에 먼저 취하란 뜻. 지면 하나에 몰빵하는 기존 관례를 깬 신선한 아이디어로 주목받았다. 동시대 감성과 호흡하는 예술가는 흔치 않다. 유명할수록 자기 세계에 칩거하기 일쑤. 광고에서 인정받은 동시대 감성을 작가는 히어로그라피에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작가의 아호는 호작(好作). 좋은 작품, 짓고 만들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중의적 의미. 작가는, 예술가는 호작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예술적으로 노는 호작질이다. 작가는 <매헌>으로 2023년 대한민국호국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 대상을 받았다. 윤봉길 의사가 직접 손으로 쓴 선서문을 목에 걸고 있는 작품. 다음 해인 1932년 의사는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 기념식이 열린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고 반년 후 24세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