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은 제2의 창조가 아닌 범죄다. 흉악 범죄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과제물의 표절이 드러날 경우 중벌을 받겠다.’라는 동의서를 내지 않으면 아예 수강 신청을 할 수 없는 엄격한 내부 지침을 운영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학생 때부터 표절은 중대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교육적 조치다.
 
언젠가 표절 운운의 기사가 연일 신문지면의 대서특필이었다. 교수, 연예인 등 신분을 가릴 것 없이 표절로 이득을 보는 함량미달 인사들이 많았다. 심지어 표절로 사고가 난 뒤에도 직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교수가 있다고 한다. 미술학계 교수이니 망정이지 역사나 철학이나 법학이나 윤리를 강의하는 자가 그런 짓거리를 했다면 그 밑에 학생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다. 이제는 거짓과 위선이 판을 쳐도 양심이란 게 마비가 되어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흐려진 듯하다.
 
그리스라는 역사 깊은 나라가 빚 덩어리로 신음했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빚쟁이 국가가 된 원인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혹평하여, 국민 모두다 도둑이기에 정의를 바로 세울 집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빚을 탕감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고발고소를 하는 원고나, 피고나, 이를 조사하는 검사나, 이를 판가름 하는 판사가 공히 뇌물을 받아먹은 전력이 있기에 벌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땅히 망해야 할 국가인 것이다.
 
그리스가 죄의식이 없는 집단으로 뭉쳐 있기에, 빚 갚을 능력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이 표절에 대한 죄의식이 없기에 표절은 오늘도 내일도 근절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먹거리를 가지고 장난치는 일도 예외가 아니니 참으로 걱정이 된다. 신선도를 조작하기 위해서 생선에 물감을 바르는가 하면 원산지를 속여 폭리를 취하기 일쑤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리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
 
어머니가 아궁이 짚불 속에 호박잎에 싸서 구워 주던 자반고등어 맛은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불탄 호박잎을 젓가락으로 살살 거두면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고등어 속살 한 점을 숟가락 위에 올려 먹으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한낱 왕소금에 절인 간 고등어이련만 그땐 그 맛이 참으로 좋았다. 고등어 특유의 생선 비린내를 고등어의 참맛으로 알았지, 그 생선의 냄새를 제거하려고 조미료를 섞을 생각은 추호도 못했었다.
 
온갖 먹거리가 풍족해 본연의 맛으로는 입맛을 사로잡을 수 없어서 인가. 한 때는 생선까지 조미료를 넣어 판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왕소금에 절인 자반고등어 그 반찬 한 가지만 가지고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던 그 꿀맛 같던 입맛이 조미료에 현혹되어 제구실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어머니와 고등어’란 노래가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 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 소금에 절여 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 놓고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 걸
 
자식의 입맛을 맞추느라 소금을 고등어 등에 뿌려놓고, 고단한 모습으로 잠드신 어머니, 이것이 모성애다. 나는 입맛이 없을 때는 이 노래를 생각한다. 어머니가 아궁이 잉걸불 앞에서 정성껏 굽던 석쇠 안의 고등어구이는 가족들의 힘의 원천이었고, 내일의 꿈을 키우는 보양식이었다. 그 때 어머니 마음은 오로지 ‘끼니 거르지 말고, 고등어구이라도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이것이 어머님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이 때 남을 이기려는 경쟁 심리도,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으로 인간대접 못 받는 사람 되지 말라고 기도했을 터이다. 이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려는데, 어린 날 아버지가 새끼줄에 꿰인 자반 고등어 한 손 사갖고 와도 천하를 얻은 듯 기뻤던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올라 울컥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