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산책하러 가는 들판에 황금빛이 출렁입니다. 농로를 따라 걷다보니 수로의 물길을 따라 고마리꽃이 무리무리 펴 있습니다. 하얀색도 있고 붉은빛도 있고 하양의 봉오리 끝에 분홍빛을 물고 있는 꽃도 있습니다. 쌀알 크기의 잔꽃들이 모여 한 송이를 이루는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야만 할 만큼 앙증스럽게 작고 투명하기까지 합니다. 
 
고마리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다른 야생화가 있습니다. 고마리가 습지 부근을 좋아하는데 비해 산길 주변이나 메마른 밭둑 같은 곳에서 잘 자라는 며느리밑씻개풀입니다. 줄기에 잔가시가 돋아 있다는 것 말고는 고마리와 거의 구분이 안 되는 앙증맞고 예쁜 꽃을 피우는데도 이름은 참 고약합니다.
 
우리 들풀 중에서 ‘며느리’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것으로 며느리밑씻개풀 외에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배꼽도 있습니다. 예쁜 들꽃에 굳이 며느리라는 말이 왜 들어갈까요?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꽃처럼 예뻐 보여서일까요? 그렇다면 며느리밑씻개라는 고약한 이름을 붙였을 리가 없지요. 며느리밥풀꽃은 분홍통꽃을 피우는데 꽃잎에 쌀알 같은 하얀 무늬가 도드라져 있습니다. 옛날 어느 심술궂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밥이 다 되었는지 솥뚜껑을 열고 밥알 한두 알을 맛보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부엌에 들어온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쌀밥을 남 먼저 먹었다고 오해하여 심하게 핍박을 했답니다. 억울한 며느리는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죽음으로 호소했는데, 그 며느리의 무덤에서 입술에 하얀 밥알 두 개를 문 분홍꽃이 피었고 이 꽃을 며느리밥풀꽃이라 이름 지었다 합니다.
  이처럼 우리 민담에는 고부 갈등을 담은 이야기가 적지 않은데 대개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구박당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자신도 그러한 며느리 시절을 겪었음에도 시간이 흘러 시어머니가 되니 아들을 빼앗아간 며느리가 미워져서 자신이 당한 며느리살이를 그대로 물려줍니다. 그러니 아무리 올곧은 며느리가 들어와도 시어머니의 상실감이 며느리를 제대로 보는 눈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9월경에 덩굴마다 하얀 꽃을 무리무리 피우는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을 가진, 줄기가 연하고 잘 끊어지는 식물이 있습니다. 추수를 돕는 귀한 사위가 힘들까봐 장모가 다른 일꾼들 몰래 사위의 짐을 덜어내는 걸 보고 사람들은 이 덩굴로 사위의 지게 질빵을 만들어도 안 끊어지겠다며 놀렸다고 해서 이 덩굴에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사위가 내 딸에게 더 잘 해 주기를 바라는, 내 자식에 과하게 치우친 사랑이 며느리를 보는 눈과 사위를 보는 눈이 달라지도록 했겠지요.
  최근 우리 문학계에 크게 자랑스러운, 아니지요, 문학계를 넘어 온 나라가 기뻐할 소식이 들렸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최초로 소설가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번번이 수상이 불발되었는데 이번에 한강 소설가가 그 아쉬움을 불식시킨 쾌거를 이뤘습니다. 그는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노벨문학상과 함께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맨부커상을, 지난해에는 프랑스의 메디치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가입니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 가하는 폭력을 서정적인 말갛고 투명한 문장으로 그려내는데 이는 그가 처음에 시로 등단한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행위만 폭력인 게 아니라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가 인간, 특히 여성에 가하는 폭력이 ‘채식주의자’ 속에 페이드 인(fade-in)되고 있음에 비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5.18 광주항쟁에서 군부 독재가, 제주 4.3사태에서는 이데올로기가 행한 물리적 폭력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폭력은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극단적 편 가르기에 교묘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김 아무개라는 작가는 한강의 소설이 피해자에 편향된 왜곡된 역사를 표현한다고 비판하며 그의 노벨상 수상이 적절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자신의 SNS를 통해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며칠 전에 어떤 극단적 보수단체가 스웨덴 대사관에 몰려가서 좌편향 문학에 노벨상이 주어진 것을 반대하여 시위하는 부끄러운 모습도 봤습니다. 동과 서의 지연에 따라 좌와 우로 분열된 우리의 정치적 분열이 만든 씁쓸한 풍속도입니다.
고마리면 어떻고 며느리밑씻개면 어떻습니까? 작고 예쁜 야생화라는 본령은 동일한데 다만 줄기에 난 자잘한 가시 때문에 고약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백 번 양보하여 역사를 대하는 작가의 시선이 피해자의 시선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하더라도 그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문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정치적 이분법을 떠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