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왔다. 스치는 바람이 차디차다. 약해진 몸을 추스르겠다고 여름부터 별러온 발걸음이다. 태양도 찬 기운이 싫은가보다. 이내 모습을 감춘다. 아직 땅거미 깔릴 시간이 아닌 듯싶은데 말이다.
 
평소 땅거미를 싫어한다. 땅거미 보다는 차라리 어두운 쪽이 낫다. 어둠은 불빛의 고마움을 안다. 어둠에 폭 싸일 때 차라리 행복을 느낄 때도 있었다.
 
이 때 어디선가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파트 놀이터 옆 정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순간 자석에 빨려들듯 소리 나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인의 모습이 불빛에 실려 흐릿하게 보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이 전에도 몇 번 있었다.
  여인이 울고 있다. 얼핏 보니 50대 초반인 듯싶다. 술에 잔뜩 취한 음성인데, 누군가와 휴대전화를 하면서 울고 있는 것이다. 통화 시간이 길었다. 멍청하니 나는 여인의 헝클어진 그 모습을 재미나는 영화의 한 씬을 감상하듯 보고 서 있었다. 사랑하는 남성과 헤어졌는가. 상대방에게 원망의 말을 퍼붓다가 곧이어 애원조로 톤이 바뀌기도 했다.
 
아파트를 두 바퀴 더 돌았다. 여인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사연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만약 실연 때문이라면 이런 말로 위로를 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가슴에 못을 박듯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인생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약이 된다.’라고 말이다.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다운 만추다. 나는 가을이 좋은 만큼 겨울이 싫다. 이 가을 한아름 단풍을 가슴에 안고 훨훨 하늘 끝으로 날아오르고 싶다. 진정 놓아주기 싫은 계절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듯 영원히 곁에 두고 싶은 가을인 것을….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가슴을 울리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젊은 날 목숨처럼 사랑했던 연인이 있었고, 사랑을 불꽃 튀게 해 봤지만 여태껏 사랑이 지닌 신비로움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잘 모른다. 인간의 힘으론 풀지 못하는 영원한 미지수의 단어 사랑 아니던가. 이 사랑이란 단어는 시를 빚게 하고, 이별을 만들고, 질투를 낳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하렸더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이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고 했던가. 진정한 사랑은 소유도 집착도 아니다. 그럼에도 가버린 사랑이 더 애틋하고 미련이 남는 것은 집착을 넘은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별마저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