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남단에 위치한 경주시 외동읍은 울산과 인접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자동차 부품협력업체가 입주해 있어 연안리를 비롯해 입실·모화·구어·냉천·개곡·석계 등을 중심으로 공단을 조성하고 있다.32개 행정리에 인구 2만2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외동읍은 지난 2015년 포항~울산간 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접근 편의성과 공업도시 울산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16개소의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돼 농공이 함께 발전하고 있는 풍요로운 고장이다.한때 외동의 중심이었던 연안리는 평지가 대부분의 지역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남쪽으로 연안천이 있어 그 지류가 마을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마을 중앙에 연지못이 위치해 있으며 대랍들(대나무 숲), 바댓들(바다처럼 넓다는 연지 서남쪽에 있는 들), 황새밭(대조평, 황새가 많이 앉았던 들) 등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연안의 마을 이름은 옛날 경주김씨 연안 입향조 김연이라는 선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청안이씨, 함안조씨 등 세 선비가 함께 이 마을을 개척, 김연의 이름에서 ‘연’자와 두 성씨의 관향 명칭 중에서 공통으로 쓰여진 ‘안’자를 따서 ‘연안’이라 부르게 됐다.연안은 과거 동해남부선과 신작로(국도 7호선)가 생기기 전에는 동으로는 개곡을 지나 동해로 나가는 길목으로, 연안은 서로는 제내·덕동·냉천·북토 등 노서로 나가는 길목으로 남북으로도 거리상 외동의 중심이었다.
연안은 1910년경 면소재지가 있었던 곳이나 일제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연안 일대(연안초등학교 남쪽 앞, 연안천 북쪽 부둣골 사이 들)에 있던 일제 관공서가 이름 모를 이들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이후 현재의 입실리 읍사무소 위치로 옮기게 됐다. 또한 기차가 정차하기에 오르막길과 굴곡이 있어 입실로 옮기게 됐다는 설도 있다. 현재의 연안리는 새바대, 연안, 부둣골을 연안1리로 13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연지, 아랫마을, 윗마을, 샛마을 등을 합한 연안2리는 230여가구가 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외에 열무, 시금치 등 채소와 사과·배 과수를 재배하고 한우·돼지·닭을 대규모로 사육하는 축산업도 발달돼 있다. 1962년 설립 인가를 받고 다음해 개교한 연안리 소재 연안초등학교는 1980년대까지 12~15학급을 유지하며 한 해 졸업생도 최대 919명(1970년)까지 배출했다. 이후 1990년대 급격히 인구가 줄어들면서 2024학년도 현재 1학년의 경우 자유학구제 운영으로 13명이 입학, 거리가 먼 입실초등학교, 모화초등학교 입학 예정 학생들도 연안초로 입학했다.
연안리 1007-10번지의 옛 하천 부지에 있던 천연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돼 있던 연안 왕버들나무가 있었으나 1973년 9월 14일 지정 해제됐다. 연안 왕버들나무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동제)를 지내는 곳으로 지금은 새로운 노송과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다.연안에는 영양남씨 남구명을 추모하는 재실로 우암재를 지내고 있다. 남구명의 묘는 연지 옆 배산 정상에 있다. 공은 호가 우암이며 진사 문과 급제 후 순천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현재 후손들은 경주 보문·암곡·구어·북토 등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 11월 16일 연안리에 호국동산을 조성했다. 호국동산에는 기존의 임란공신 충의비, 6·25 및 월남전 참전용사 명예선양비가 함께 이전됐다.앞서 임란공신 충의비는 2007년 임란공신 숭모회가 44위 공신을 확정하고 비문을 제작해 외동읍민체육관 동편에 조성했다. 또 참전용사 명예선양비는 2001년 외동지역 상이용사회와 재향군인회 등이 입실리 산 일원에 설치했다. 하지만 접근이 쉽지 않아 유족을 비롯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호국동산을 연안리로 이전하게 됐다.이외에도 말 다섯 마리가 뭉쳐있는 듯 한 모양의 산으로 오마산 등이 있다.
연안1·2리의 자연부락으로는 고랑각단·큰마실·새바다·아랫마을·연안·연지·윗마을·샛마실·부들골 등이 있다.인접한 여러 자연 부락 중 가장 큰 마을이라고 해 ‘큰마실, 대리’라고 불린 이곳은 과거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남양홍씨, 영양남씨 형제들이 연안에 사과를 처음 들여와 사과 농사로 부농이 많았고 지금은 채소와 논농사가 주업으로 이뤄지고 있다. 고랑각단은 연안천 남쪽 조그만 야산이 있고, 이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이다. 현재 없어졌으나 과거에는 30여 가구가 이곳에서 거주했다. 520여년전 일어난 대홍수 이후 배수가 잘 되지 않고 물이 마치 바다처럼 고여 있었다고 해 ‘새바다’라 불린 이곳은 연안교에서 동쪽 개곡리 올라가는 우측에 있으며 당초 개곡리였으나 연안리로 편입됐다. 아랫마을은 시냇물을 경계로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연안 아래 농협 창고 서쪽, 세원(신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연안은 연안1리의 중심이며, 연안 하천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외동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나 화재가 발생한 이후 없어졌다. 연지는 국도 7호선 연안사거리에서 서쪽 마을 안으로 따라 내려가다보면 아랫마을 지나 철도 건너편에 위치해 있으며 배산과 함께 붙어있는 연못이 있다. 이 못에 연이 자연적으로 무성하게 자라 ‘연지’라 불렸으나 지금은 연못을 깊이 파내어버려 연은 거의 없어지고 유료 낚시터로 운영되고 있다. 과거 못 주변 작은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랫마을을 흔히 ‘연지’라 부르고 있다.연안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다 다시 남서방향으로 아기봉산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면 부들골이 있다. 이곳에는 아주 오래된 왕버들나무가 내남~덕동으로 가는 904번 도로 옆에 자리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동제를 지내기도 했다.
박준호 외동읍장은 “연안1·2리는 동네가 붙어 있어서 마을동회도 같이 하고 경로잔치도 같이 한다”며 “학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 어느 마을보다 화합이 더 잘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연안초등학교 2회, 8회 졸업생인 연안1리 안순홍(72), 연안2리 이상욱(66) 이장은 “마을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냈던 동제는 3년 전부터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됐고, 15년 가까이 매년 치뤄졌던 국회의원배 축구대회도 최근 재정이 어려워 더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안 이장은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연안1·2리 마을 주민들은 화합이 잘 되고 활발한 소통과 정으로 똘똘 뭉친 마을”이라며 “최근 외동 인구가 다시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우리 연안리에도 젊은 세대를 비롯해 새로운 가구원이 들어와 다시금 활력이 넘치는 마을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