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을 맞고 보니 왠지 가슴에 찬바람이 이는 듯 허허로움을 느낀다. 세월이 왜 이다지도 빠를까. 날씨가 덥다고 투정 부리던 심술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겨울의 문턱에 가을이 닿았다고, 언론들이 호들갑을 떤다. 하긴 그렇다. 11월도 중순이니 올해도 아듀가 눈앞이다. ‘봄 처녀 가을 총각’도 허툰 옛말이었다. ‘봄 총각 가을 처녀’로 바꿈이 타당할 듯하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서러울 줄이야.
 
지나간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특히 사람에 관해선 더욱 그 기억이 선명하다. 지난 시간 고운사람, 미운 사람,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미운 사람 고운 짓 하는 것 보지 못했고, 고운 사람이 미운 짓 하는 것 보지 못하고 살아 온 세월이었으니, 나도 참으로 만고풍상의 생을 살아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세월이 무정타 한탄하고, 인심이 각박하단 원망도 들리지만, 이 한 해 진정으로 아껴 주는 지인이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힘들 때 용기 주고, 외로울 때 정주는 이웃이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만 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 무엇을 닮았을까./날으는 기러기, 눈이나 진흙을 밟는 것과 같은 것을/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지만/훌쩍 날면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중국 북송 때의 제1의 시인으로 “독서가 만권에 달하여 율(운문의 리듬)은 읽지 않는다.”고 해서 초유의 필화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기도 했던 소동파의 시다. 인생이란 날아다니는 기러기가 눈이나 진흙 위에 잠깐 내려앉는 것과 같다는 뜻이란다. 
 
눈 위나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겨 놓고 떠나는 기러기, 그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참으로 조용하고, 엄숙하다. 이를 두고,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배려의 몸짓이라고 시인들은 미화했다. 나는 ‘배은망덕’ 이란 사자성어를 경계성 문자로 여기며 이것을 머리에 이고 산다. 남한테 입은 은덕을 저버리지 않기 위함이다.
  한 마디의 따뜻한 말, 온기 담긴 한줌의 선물, 이렇듯 나에게 베풀어 준 이웃을 잊을 수가 없다. 보답은 해야겠는데 재주와 능력이 없어서 때론 아쉽다. 법륜 스님은 당신의 저서『인생 수업』에서 “세상에서 입은 은혜는 갚고 떠나라” 라고 했다. 그는 한 때 삶의 습관을 내려놓고, 소박하게 먹고 입고 자겠다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욕심은 나이와 더불어 눈덩이처럼 한없이 불어나나보다. 
 
지인 한 분은 나이 들어 도회지에 살아야 한다며 시골집을 팔고 시내로 옮겼다. 병원 가깝고 문화시설 좋은 도회지 생활이 노년의 삶에 유익하다는 생각에서다. 법륜 스님의 노후 벽과 정 반대 현상이다. 인생의 한 주기는 60년이다. 그래서 61년이 되는 해를 환갑이라고 했다. 생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왔다는 뜻이다. 살만큼 살았다는 의미에 더하여 내면을 성숙시키라는 말인 듯싶다.
법륜 스님은 또 60세가 넘어서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입었던 은혜를 세상에 조금이라도 갚고 가겠다.’라는 마음을 가슴에 담으라고 했다. 그리되려면 돈이 없어도 여생을 보람 있게 살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제 손아귀에 잔뜩 움켜쥐었던 온갖 물욕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노후를 맞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