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심리에는 ‘온당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 뜻은 사리에 맞고 무리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통된 견해로 자기 자신을 어떠한 인물인지 잘 모르면서 남에 대해서는 과열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라는 말의 풀이는 말하는 사람이 이름 대신에 ‘자기’ 스스로를 일컫는 제 일인칭 대명사로 평교간이나 아랫사람에 대하여 쓰며, 조사 ‘가’가 붙으면 ‘내’가 되는 말이다. 수많은 성인들과 현자들이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인물평을 해왔지만 명쾌한 해답만 있을 뿐 정답 찾기에 많은 세월만 흘렀다. 자조(스스로 자신을 비웃음)하는 넋두리로 세상을 원망하고 운명(필자)을 원성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보편적인 호소로 저절로 부서지는 자괴심으로 허공을 향해 소리 지른다. 이 광활한 대지에 나를 던진 자는 누구이며, 착하고 선량한 자가 요절하며, 악하고 거짓된 자가 어찌하여 장수하는가. 이것 또한 운명인가. 괴로움이 많은 속세의 바다 고해(苦海)에 사는 자는 누구이며, 황무지 같은 광야에 야인(野人)으로 던져진 자는 그들만의 숙명인가. 세상이 고르지 못함을 하소연하며 사는 것이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것도 역시 인간인 ‘나’이다.성경 ‘갈라디아서’에 나란 어떤 사람인지 밝힌 성구가 있다.“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 된다. 각 사람은 자기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내 인생은 내 지게에 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이탈리아 시인으로 ‘신곡’을 쓴 단테도 “너의 길을 걸어가라.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든 내버려 두어라” 어느 정치가도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내 갈 길로 가겠다는 마이웨이를 외치고 있다.사실 나라는 인물은 나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나’인 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도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얼마 안 남았지만 조금 남은 여생은 나 스스로를 위해서 살기를 당부한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남을 배려하고, 남을 돕는 일에 등한시하라는 것이고, 아집과 고집으로 자신만을 위한 일에 이제 신경을 끊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를 너무 앞세우면은 패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욕심이 패망의 원인이기도 하다. 자기를 먼저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저절로 빵(재산)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벗이요, 내 온 몸은 바로 기쁨이고, 노래이고, 불꽃이며, 무기요. 재산이라는 것이다.모두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무료하게 헛된 공상에 젖지 말고, 내가 한 일, 내가 할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을 뒤돌아보는 자성(自省)의 때가 되었다. 얼마나 참을성 있게 겸손했는가를 자화자찬하지 말고 자승자백 해보자. ‘자승’은 스스로 자기가 남보다 나은 줄로만 여기는 자만이고, ‘자백’은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자는 것이다.성서에도, 여호와께서는 교만한 자를 업신여기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겸손을 배우면 영광이 뒤따른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고 한다.겸손은,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볼테르도 ‘그의 철학 사전’에, 겸손은 거만의 해독제란 말을 남겼다. 유순과 겸손에서 덕(德)이 생기고, 자아(자신)를 역설하는 데서 모든 죄가 생긴다고 했다. ‘팔만대장경’에도, 부자의 겸손은 가난한 자의 벗이 된다.우리 민족은 예부터 932회라는 외적의 침략을 받은 탓인지 양반성미에서 다혈적인 성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교통사고가 많은 것도 급한 성격인 조급증이 심한 이유라 한다. 양보는 쉬운 뜻으로 남에게 길을 비켜주는 것이고,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좇는 것으로 배려인 것이다. 배려는 여러모로 마음을 쓰고 염려해주는 선한 마음씨다. 모두가 그것이 부족하다고 한다. 양보는 교통사고를 방지하는데 절대 지켜야 할 좋은 예방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