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일이다. 학교만 파하면 단골로 들리는 장소가 있었다. 장마철이면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기던 동네의 만화가게가 그곳이다.    어머니께서 주신 용돈을 만화책 보는 일에 전부 허비하기 일쑤였을 뿐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조용히 나를 불러 앉힌 후 회초리를 들었다. 그리고 빛이 누렇게 바랜 헌 책을 한 권을 내미는 것이다. 얼떨결에 그 책을 받아들었다. 제목이 『유관순 누나』이렇게 씌어있었다. 일제 강점기,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 누나의 모습이 겉표지에 그려진 위인전이었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은 후 글쓰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붙이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일까. 어디 이뿐이랴. 요즘처럼 동화책을 접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만화 가게에서 빌려보는 만화책은 당시 나에겐 최고의 선물이고 유일한 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상에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을까. 오리가 물위에 유유자적 떠다니는 모습은 일견 평화의 상징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 오리가 물 위에 떠 있기 위해서 쉼 없이 발놀림 질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부단한 자맥질 없이 우연한 행운으로 오리가 물 위에 뜨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경험한 때도 있었다. 우리는 이를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유관순 누나』와 나의 만남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하여튼 만화가게와 『유관순 누나』가 오늘의 나를 문인으로 만든 것만은 틀림이 없다. 어린 날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들게 만든 나의 만화 독서광, 그리고 동화책 읽기, 그런 글 읽기 취미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만난 첫사랑, 우연히 안은 로또 행운, 우연히 만난 소꿉친구, 과연 우리는 일생을 통하여 이 우연의 우연과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길 바라는 것도 우연에 대한 기대인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사랑도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 역시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했다. 생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우연히’에 귀가 솔깃해진다.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에 흠뻑 젖어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행복하냐 물었지 아무런 말도 없이/눈물만 뚝뚝뚝 흘리는 그 사람/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을 해 놓고 안아주었지/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사소한 사건이나 물건 하나가 도미노처럼 연결 되고, 증폭 되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는 현상을 ‘핀볼 효과’라고 한다. 아무리 옛사랑 추억이 소중하다고 하여도 가정을 가진 자가 노래 ‘우연’의 가사처럼 행동을 한다면 사회 정서상 용서가 될까.   통계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을 꿀단지처럼 남모르게 가슴에 품고, 이어진 사랑을 녹이며 소중히 가꾼다고 한다. 이를 두고, 첫사랑이 사랑의 핀볼 효과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면 억지가 될까. 분명, 누구에게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누군들 몽매에도 그리던 첫사랑을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만난다면 가슴 설레지 않을 자 없을 것이거늘, 그러나 어쩌랴. ‘여자는 마지막 남자를 기억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눈감는 순간까지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라고 하지 않던가. 필자의 첫사랑 남자도 아직도 나를 가끔 생각하고 있을까?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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