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물 스티커 부착이 무색할 만큼 멀쩡한 물건이 버려져 있다. 아까운 마음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품 특유의 옻칠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4인 가족의 사각형 두레상인데 고급 제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인 가족이 쓰던 밥상이다. 가끔 지인 집을 찾아가면 그녀는 그 밥상에 사랑과 정성을 담아 음식을 올려 식구의 끼니를 잇곤 하였다. 김치, 된장찌개, 콩자반이 찬의 전부이건만 가족은 모두 게 눈 감추듯, 맛나게 밥그릇을 비우곤 했다. 그녀 남편은 노동꾼이었다. 막노동 일을 하면서 어렵게 꾸려가는 살림이었지만 언제 봐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였다. ‘아내는 집안의 거울’이란 말이 있듯, 이 말에 잘 어울리는 그녀였다. 늘 표정이 밝은 그녀로 하여금 집안에선 항상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들려왔다. 노동일을 하던 남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그녀가 얼마 전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연세 높은 그녀 시어머니가 아들 병간호를 하였지만 그분도 며칠 전 세상을 떴다고 했다. 이제 대학생인 그녀 딸인 영숙이마저 가출을 하자, 하는 수없이 영숙이 고모가 와서 집안 짐정리를 했다고 한다.
음침한 반 지하였고, 집안이 비좁아 번듯한 식탁 하나 들여놓지 못하던 그녀 살림이었다. 밥상다리 하나가 부실하여 밥상이 엎어지자 남편이 궁여지책으로 나무 막대기를 박아 쓰던 헌 두레상을 놓고 살았다. 언젠가 그 헌 상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자신이 시집올 때 해 온 두레상인데 세월 따라 이 상도 주인과 함께 노쇠했다며 형편 되면 새 두레상을 사야겠다고 벼르던 그녀였다. 얼마 안돼 그 밥상을 버리고 지금 버려진 새 상을 샀다며 기뻐하던 그녀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지금 그 두레상이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루에 세 번 씩 가족을 모아 놓고, 정을 나누어 주던 4각 밥상이 버려진 것을 대하자 마치 기력을 다하고 죽은 어느 노인의 시신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요즘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진 두레상이 자주 누에 띈다. 짜디짠 장아찌, 시큼한 김치, 숭늉, 고추장, 된장, 뜨거운 국그릇등을 마다않고, 싸안은 채 하루 세 번씩 식구 앞에 나타났던 지난 날 밥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버려져서 인간도 쓸모가 없어지면 저렇게 홀대를 받는가.
두 사람만 모여도 옛날이 좋다고 한다. 마을의 아낙들이 모여드는 공동우물터에서 마을의 이야기가 생성되고, 하루 세 번 둘러앉는 밥상머리에서 가족의 사랑이 피어났던 지난 시절이다. 이것 하나로도 옛날이 좋은 것이다. 밥상머리 버릇, 밥상머리 교육이란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어서다. 이젠 4각 밥상이 자리를 양보한지 오래다. 아이들의 돌잔치, 부모님의 생신잔치, 잡다한 경조사, 이 모두를 뷔페 식당 등이 대신하니 4각 밥상이 앉을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정이 소중한 것은 남녀의 사랑보다 질기기 때문이다. 부부지간의 만남도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만난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정주고 살아보라. 반드시 정 받고 사는 인생이 된다.
그녀가 왜? 그토록 두텁던 가족의 정을 저버리고 가출을 했을까. 가슴 아프다. 예기치 않은 남편의 발병, 병석에 누워계신 홀시어머니, 딸아이의 학비 때문, 아님 남편에 대한 정이 식어서인가. 아니다. 분명 이것이 아니다.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선 에너지의 재충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머지않아 한 보따리에 정을 가득 담아 안고 돌아올 것이다.
힘없이 허물어지는 집단을 두고 사상누각에 비유한다. 살아오면서 4각 밥상을 장구하게 떠올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그간 우리들은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를 합창하며 살아온게 아닌가 싶다. 이제 구호를 다시 바꾸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다. 크나큰 두레상을 마련하자. 그 두레상을 우리의 정으로 채우자. 그리고 그 두레상 이름을 ‘공동체 두레상’이라고 하자. 지상에서 가장 멋있고 맛있는 진수성찬을 올리는 인정의 밥상이 될 것이다. 이제라도 버려진 정을 다시 모으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