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 82번지에 가면 조선조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 장군의 묘가 있다. 그는 1540년(중종 35) 병마절도사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나 28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가문 대대로 무인의 집안이었다. 처음 선전관으로 출발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는 그 공로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런 후 1591(선조 24)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거제 현령 시절의 무능함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1년 뒤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은 양국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발발 초부터 일방적인 패전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 휘하 병사들과는 달리 경상 우수사 원균과 좌수사 박홍 장군의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약간의 장병들만 남아있었다. 원균 장군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옥포, 당포 등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으로 많은 언쟁이 발생하였고,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원균은 크게 반발했다. 그는 이듬해 충청 병사로 전출되었고, 병사로 재직 중에도 이순신의 부당함을 고변하는 등 수군 작전권에 관한 계획을 여러 번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런 와중에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자 1597년 2월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이순신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해 또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그는 삼도 수군을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 중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원균은 우리나라 여러 장수 중 평가가 가장 많이 엇갈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로부터 권율,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1등공신으로 책록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충무공 전기에는 이순신을 모함한 인물로 나와 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새겨진 인물이기도 하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그의 묘소에는 실제 그의 시신이 아닌 장군의 신발만 묻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전쟁으로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말이 장군의 신발을 입에 물고 수 천리 고향까지 달려와 전사 소식을 알려주고는 쓰러져 바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묘지에는 장군의 신발만 묻고 봉분을 만들었으며, 묘지 아래에는 그 말을 묻은 작은 봉우리 앞에 애마총(愛馬塚)이라는 비를 세워주었다. 풍수가에서는 이곳의 혈장을 목마른 말이 목을 쭉 빼고 혈장 아래의 저수지에 물을 마시는 형국인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고 하나 아쉽게도 시신이 없어 발복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훗날 원균의 묘로 추정되는 장소가 통영에서 확인이 되어 주목된다. 해당 장소는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 435번지로, 외형으로만 보면 무덤인지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데, 지역에서는 엉규이(지역 사투리) 무덤 혹은 傳(전) 원균 묘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전만 전해올 뿐 확실한 자료나 근거가 없어 해당 묘의 발굴조사를 통해 하루빨리 원균의 묘가 맞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