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화로(火爐)와 겨울의 부채(扇)'를 뜻하는 말, 하로동선(夏爐冬扇). 이 말은 격(格)이나 철에 맞지 아니함을 이른다.
 
낡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처하지 못하는 성질을 띨 때, 그를 가리켜 흔히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한다.
  시대착오적인 것은 대개 지양되기 마련이나, 만일 한 나라의 정치사(事)가 그러지 못할 때는 큰 비극이 뒤따른다. 그 비극을 어찌 일개 도적(盜賊)의 화(禍)에 비하랴.
 
예컨대 우리 조선시대 말기의 정치사는 시대착오의 극단적 사례였다. 
 
국제 열강이 근대화를 추동하며 제국주의로 치달을 때, 여전히 봉건왕조 체제를 고수했던 세도정치 세력, 그 가렴주구의 폭정이 빚어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핍박은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삼남 일대의 민중이 한마음으로 봉기하여 삼정(三政)의 개혁을 요구했지만, 조선 조정은 끝내 청(淸)과 일본(日本)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 결과 동학농민군 수십만 명을 외국 군대의 총격 아래 희생시키는 비극을 만들고야 말았다.
  '만민평등(萬民平等)'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외쳤던 동학농민혁명, 그것은 우리 역사 속 최초로 싹튼 근대적 민본민주주의의 꿈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민중이 근대역사 속에 겪어야 했던 지극한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그 비극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 36년을 겪고도 그치지 않았으며, 남북 분단과 6·25 전쟁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휴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역사 속의 민중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
  그러고도 그 비극의 그림자는 우리의 마음 밑자리에 도무지 삭여지지 않는 응어리로 남아 있지 않은가.
2024년 세모 엄동설한에도, 우리 대한민국의 민중들은 위헌 행위를 탄핵하며 연일 밤을 새워 시위에 나서 있다.
 
이 시위는, 알다시피 대통령 윤석열 일당이 촉발케 한 것이다.
  지난 12월 3일 엄동설한 한밤중에 느닷없이 선포한 윤석열의 비상계엄 조치는 그야말로 '시대착오적 홍두깨'였다. 
 
그날 밤에 국회(國會)로 진출하여 유리창을 깨고 난입하던 총기를 든 군대의 모습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날강도의 침범과 같았다.
  그와 함께 우리는 국회와 헌정(憲政)을 지키고자 나선 시민들의 모습과 국회의사당 담장을 넘어서 본회의장으로 가던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또한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날 밤에 그렇게 계엄 해제 절차를 국회가 신속히 이행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작은 불씨도 조기에 잡지 못하면 산천을 태우듯이, 온 나라가 군홧발에 짓밟혔을 것이다. 
 
그뿐인가 자칫 남북이 다시금 원치 않는 전쟁에 휩쓸렸을지도 모를 일, 도대체 누구를 위하며 무엇을 위한 계엄 조치였는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이 더욱 성숙해진 모습을 우리가 다 함께 확인하였다는 사실이다.
  겨울밤의 한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탄핵과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는 일이 어찌 고심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시위 참가자들 저마다가 양심과 교양에 근거하여 고심하며 판단했을 것이다.
  우리의 헌정이 앞으로 나아가느냐 되돌아가느냐. 우리가 이 시국의 주체이냐 객체이냐를. 
 
그리고 우리 일상을 위협하는 끔찍한 위험 요소를 우리가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일상의 평안을 회복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불가피하게 최소한의 자구 조치로서 시위에 참여했을 것이다.
  국회가 그에 부응하여 나서서 계엄 해제와 탄핵안 발의를 이끌어낸 상태이나, 아직은 그것이 국민의 의사에 충족되지 않는 미완의 조치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치계는 지금이라도, 정파를 가리지 않고 그 누구라도, 계엄 조치가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일이며, 우리 국민의 희망을 배반하는 것이었음을 공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사태는 예전과 달리, TV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송출되었고, 그래서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지켜본 일이 되었다.
  세계 시민들도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주의(Reactionism, 反動主義)라고 인식하는 한편으로, 그에 대처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보여준 민주주의의 역량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이번 시위에서는 특히, 젊은 층, 여성과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그 역할도 주도적이었다. 심지어 십 대의 학생들조차 그동안 윤석열이 보여준 언행들을 용납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이를테면 손에 '王'자를 적어서 대선 토론에 나선 것에서부터, '처단한다'라는 쓴 포고령 문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잘못이 함축하는 뜻을 낱낱이 또렷이 풀어내며 규탄하고 있다.
  이제 더는 시대착오적 반동, 국민을 속이는 우민정치, 국민을 억압하는 권위주의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연약한 젊고 어린 개개인이 모여 한목소리로 온 세상이 울리도록 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계엄선포가 단지 '경고용'이었다고 얼버무리는 윤 대통령은 오히려 스스로 '하로동선'임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하로동선의 굴레는 도적보다 두렵다. 윤석열이 이대로 하로동선이기를 고집한다면 그럴수록 그는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자리를 스스로 남김없이 잃어 갈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점에서 우리 지역의 시민 대중들은 다시금 쉽고도 어려운 숙제를 받았다.
  우리는 어째서 지난 선거에서 이러한 사람이 최고 통수권자가 되도록 거들었던 것인가, 어째서 우리 지역은 시의회 의원직의 절대다수를 수십 년간 줄곧 특정 정당 소속으로 채워지게 했는가.
  이와 같은 편향 상태로 의회주의와 지방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가, 또한 이런 편향을 남 탓이라 돌리며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온당한가. 지금 우리의 판단과 안목에는 어떤 결함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언제까지 이처럼 균형감을 잃은 채 살아갈 것이며, '하로동선'을 다음 세대에 대물림해도 되는가.
  이런 물음을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일이, 하로동선의 굴레를 벗는 숙제하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