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 24-5번지에 가면 조선조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의 묘가 있다. 영창대군(1606~1614)은 선조대왕의 유일한 적자(嫡子)로 지지세력이 확고하여 세자로 거론되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당시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있었지만 영창대군은 선조의 14 아들 중 유일하게 정비인 인목왕후의 아들로 선조의 총애가 각별하였기에 광해군을 대신하여 얼마든지 다시 세자로 책봉될 수도 있었다.
영창이 태어날 때 선조의 나이가 55세였고 인목왕후는 23세였으며 광해군은 32세가 되었다. 늦게나마 적자소생이 생기자 선조는 마음이 흔들렸고, 죽기 전 영의정 유영경 등 소북(小北)파들과 함께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논의 하였으나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 등 대북(大北)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러던 중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세자책봉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양강을 무대로 시와 술을 즐기던 명문가의 서자 출신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가두는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들은 이들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 진술케 하였고, 영창을 왕위에 위협을 주는 인물로 낙인찍어 폐서인(廢庶人) 신분으로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그가 철없는 8살의 어린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되자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독방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퍼 그 열기로 죽게 하였다.
그런 후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반정이 성공을 거두자 다시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고 영창대군의 관작은 복구되었다. 이 묘소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에 있었는데 인조는 영창의 무덤을 왕자의 예로 다시 이장하고 당시 우의정이던 신흠에게 묘지명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남시의 도시개발계획으로 1971년 8월에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으로 다시 이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묘지명이 미처 수습되지 못했다가 이후 도시가스 시설 공사 도중 영창의 운명처럼 파손되어 발견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의 산세는 한남정맥인 문수봉(403m)에서 뻗어 내린 지맥이 이천시 모가면의 대덕산(350m)을 일으키고 여기서 동남쪽으로 내려와 과협을 한 후 설성면의 큰바래기산(414.1m)을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본 묘소는 주산에서 다시 남서 방향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내려온 끝자락(龍盡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혈장은 주산과의 거리가 있어 뒤편이 허한 단점을 가지고 있고 좌우 청룡·백호도 높이나 거리면에서 완전하지를 못하며 안산과의 거리감도 있어 장풍국(藏風局)을 이루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혈장에는 그럴싸한 혈증도 없고 현재는 묘소 뒤쪽으로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혈장으로 공급되는 생기조차 차단되고 있는 모습이다.
수세는 좌우 용호 사이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마을 앞에서 만나 청미천으로 흘러들어 최종 남한강에 합류된다. 조선조에는 풍수의 전성기로 왕가의 묘소는 대부분 길지에 자리 잡고 있으나 이곳은 풍수적 길지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