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몹시 귀한 이곳에도 그저께 눈이 내리더군요. 눈발에 섞여서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환호하고 뛰어다니는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솟구쳐서 눈송이에 섞여 내립니다.
짧게 내리던 눈이 그치고 밤중에는 구름 걷히고 별이 총총한 하늘에 상현달이 말갛게 떠 있습니다. 겉옷을 찾아 입고 마당으로 찬바람을 쐬러 나갔습니다.
땅바닥을 겨우 덮는 적설량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이곳저곳에서 모아 뭉친 눈으로 자그마한 눈사람 둘을 만들어 놀이터 가장자리 턱 위에 나란히 모셔두었네요. 이걸 만든 아이들은 지금쯤은 잠자리에 들어서 두고 온 눈사람을 꿈속에서 만나기를 기대하며 잠을 청하고 있겠지요.
워낙 얕게 깔린 눈을 쓸어 모으다보니 군데군데 흙이 묻어 남루한 눈사람이지만 그걸 만들면서 조잘댔을 아이들의 구슬 같은 목소리가 오버랩되어 들리는 듯합니다.
뜬금없이 오래 전 수업 시간에 읽던 안톤 슈낙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생각이 났습니다.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따뜻한 초가을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국어선생님이 천천히 읽으면 여고생이던 우리들은 그걸 들으며 이 글을 슬픔에 대한 정의(定義)로 마음속에 각인해 버렸습니다.
본래 인간은 근원적인 슬픔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후 슬픔이란 감정을 생각하면 깊은 우물에 던져 넣은 두레박을 길어 올리듯 안톤 슈낙의 이 글이 의식의 수면 위로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또 10대 소녀 세실의 내적 성장을 다룬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이란 제목의 프랑스 소설도 생각납니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불과 19세 때 쓴 그의 데뷔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많이 읽히던 작품입니다.
즉흥적이고 자유롭게 사는 10대 소녀가 아버지의 재혼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자기 내면의 낯선 감정(어쩌면 슬픔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을)을 대면하게 되는 심리를 치밀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언뜻 제목이 슬픔에게 이별을 고하는 안녕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정작 원제에 쓰인 '봉주르'는 일상적 인사를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그러니 제목인 '슬픔이여 안녕'은 슬픔에 작별을 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처음 맞아들이는 인사로, 세실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조우하고 맞아들이면서 훌쩍 성장합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선천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지만 내면 속의 그 감정을 대면하고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까요?
인간의 다양한 감정 중 하나인 슬픔을 나약함과 무기력의 상징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을 향한 슬픔보다 다른 이들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같이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듭니다.
슬픔을 겪어 본 사람일수록 타인의 슬픔에 더 잘 공감하고 반응하며 위로도 할 수 있습니다. 위로받은 슬픔은 상처나 실패를 털고 다시 일어설 힘을 가지게 됩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오래된 경구도 있지 않습니까?
탑승객 거의 모두가 사망한 초유의 참혹한 여객기 참사에 경악하며 묵은해를 보내고 슬픔으로 새해 벽두를 열었습니다. 아무런들 유가족이 겪는 슬픔만이야 하겠습니까만 사고 소식을 접하고 수습 과정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도 남은 가족들 못지않게 슬프고 참담했습니다.
정부는 한 주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정하여 안타까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사회 각계에서도 예년이면 떠들썩하게 치르던 연말연시 행사를 자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새해를 맞았습니다.
팔순여행을 떠났던 일가족 아홉 명이 모두 사고의 희생자가 된 어느 집에 홀로 남아 여행에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의 모습을 담은 사고 관련 영상에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응답이 없는 기다림은 슬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턱없이 부족한 아픔입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점점 더 커진다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그 슬픔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할 이웃이 되겠습니다.
가족과 친지를 잃은 슬픔의 반을 우리에게 나누어서 남은 가족들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바랍니다. 반으로 나누고 또 반으로 나누면서 슬픔의 반감기가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슬퍼지려 할 때마다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