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과 공통분모를 지닌 사람에게 호감을 지니기 마련이다. 필자 경우 극히 인간적 면모를 지닌 사람에게 마음이 끌린다. 여기에 강한 소신과 주관을 갖고 있다면 더욱 매력적이다. 하지만 때론 인간만큼 사특한 동물이 지구상에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안과 밖이 사뭇 다른 이중의 격(格)을 가진 사람을 주변에서 대할 땐 더욱 그렇다. 바꾸어 말하자면, 앞에서 웃음 짓다가도 뒤돌아서면 조소하는 인물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되는 현실이 서글프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어느 글에선 나이가 지천명에 이르면 삶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을까? 이 내용 중에서 특히 사람을 판단하는 안목이 표현된 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세 치도 안 되는 혀로 간계를 꾸미는 언어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진정성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말, 자신이 궁지에 몰린다 싶으면 빤한 거짓을 밥 먹듯이 행하는 자. 이 얼마나 권모술수에 뛰어난 언행일까. 이로보아 겉으론 말은 그럴 듯하지만 속내는 뼈 있는 말, 본심과 다르게 겉치레로 하는 말, 교묘한 언어 유희로 상대방을 능욕하는 등등이 포함 된 그 내용을 허투루 생각할 일이 아닌 성 싶다. 그럼에도 필자의 경우 타인의 이런 다중적인 심사로 발설하는 언어를 분별하는 데는 아직도 서투르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잣대로 잴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측면에서인지 타인의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거짓 언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한 치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더 직설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시장의 상인이 손익으로 손님을 대하듯, 서로간의 관계를 이해타산으로 계산하여 손바닥 뒤집듯 행동하는 경박한 인품역시 제대로 파악 못하는 우매함을 지녔다는 의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니 천지의 물상은 천차만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아마도 사람마다 어떤 사안을 두고 생각하는 관점이 달라서일 것이다. 또한 처해 있는 환경 및 종사하는 직업도 제각기 다르기에 개성을 지니기 마련이어서라면 지나칠까. 이 때 떠오르는 유행가 한 곡이 있다. ‘천태만상’ 이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귀천이 따로 있나/재판한다 판사 변호한다 변호사/범인잡는 형사 /계룡산에 부채도사/연구한다 박사/ 운전한다 기사 트럭 택시/기차 전차 버스 봉고 도저 기중기/요리한다 요리사 /소개한다 중계사/파마한다 미용사 /간호한다 간호사 /얼럴러리여/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귀천이 따로 있나’= 그러고 보니 우주가 넓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허용된 공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하기에 이 노래 가사처럼 생계를 위해 종사하는 직업 종류도 무수히 많다. 어쩌면 이런 직업군 덕분에 인간 삶이 편리하고 신속하게 영위 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만이 함께 살 수 있을까? 미운사람, 고운사람 뒤죽박죽 섞여 살 수 밖에 없다. 호감이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비율을 산술로 계산한다면 반반인 듯싶다. 이를 정치적 용어로 과반이라 하는가보다. 우리의 의회정치는 모든 것이 과반을 기준으로 처리된다. 굳이 의회정치가 아니라 사사로운 결정에도 이 법칙은 유효한 것이니, 스스로의 위상도 이 잣대로 가늠하는 수밖에…. 단체의 리더를 꿈꾸는 지배자나, 사회를 형성하는 개체도 한번쯤은 생각해볼 공식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공존의 원리가 적용되나 보다. 미우나 고우나 같이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 사회구조이니, 추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미움이 있기에 사랑이 그리운가 보다.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인지라, 그저 그렇게 사는 게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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