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 이르도록 잡기(雜技)와는 거리가 멀다. 친목회에서 벌어지는 고스톱 판에도 못 낀다. 화투의 제 짝도 제대로 못 찾아서다.
한 때 노래방 출입이 성행 할 땐 그곳 가기를 꺼려했다. 음치여서다. 평소 막걸리나 맥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불콰해지니 음주역시 영 젬병인 셈이다.
하긴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 중국 북송 시대의 소동파 경우만 해도 완벽하게 모든 걸 잘 해내진 못했다.
서예 및 요리 여러 방면에 재주를 지닌 그였으나 술, 노래만은 못했다고 한다.
이런 필자를 두고 친구들은, " 무슨 일로 소일 하느냐?"라고 묻곤 한다. 이 말에 동적인 취미보다 정적인 게 좋아서 시간만 나면 책 읽고 글 쓰는 낙으로 사노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 재미없다." 라고 말한다. 그네들은, "머리 아프게 어찌 맨날 글만 쓰고 책만 읽느냐?"고 반문한다.
그럼에도 필자에겐 한 가지 매력은 있다고 추켜세운다. 술은 못 마셔도 그 분위기에 취하는 것을 좋아하고, 설령 노래는 못 불러도 풍류와 낭만을 지닌 게 그것이란다.
이런 필자가 요즘 한량 끼가 한껏 발동 했나보다. 이즈막 뜬금없이 고개를 드는 생각이 있다. '춤을 배워 볼까?' 가 그것이다.
이런 말을 꺼내면 주위 사람들은, "그 나이에 늦바람도 유분수지 무슨 춤을 배우려고 하느냐?" 라며 의아한 표정이다.
배움에 무슨 나이가 걸림돌이 될 수 있으랴. 여건만 허락한다면 진정 춤을 배우고 싶다. 춤으론 우선 블루스를 배우고 싶다.
춤이 언제 우리나라에 유입 됐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상식으론 해방 전에는 블루스, 지르박(지터버그), 탱고, 폭스 트롯, 왈츠 정도가 유행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빠른 템포의 춤이라면 스윙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 시절 이런 사교춤은 대중가요에도 영향을 끼친 듯싶다. 특히 1956년 나온 가수 안정애의 '대전 블루수' 만 살펴봐도 그 시절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잘 있거라 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대전 발 영시 오~십분세상은 잠이 들어/고요한 이 밤/나만이 소리치며/울줄~이야 아~~아/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이 노래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며 블루스의 스텝을 밟아본다. 이 때 문득 어느 언론 기사가 떠올랐다. 이 노래 가사의 간접 영향 탓이어서 일까? 대전에선 지난 8월 9일 대전 중앙로 일원 대전역부근부터 옛 충남도청 구간 도심지에서 '2024년 대전 0시 축제'가 성대히 개최됐다고 한다. 대전은 필자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특별한 기억이 자리한 고장이다. 어린 시절 친정아버지가 이곳 대전 경찰서 수사과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훗날 성장 후 결혼 하여 분가해 온갖 고초를 겪은 곳도 대전이다. 결혼 초 딸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이곳에서 삶을 꾸렸다. 남편은 그 당시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 불과 몇 개월 만에 가진 재산을 전부 날렸다. 당장 생계 걱정을 할만큼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 때 입덧이 심한 시기여서인지 거리 노점상 앞에 놓인 사과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그러나 사과 한 개 마음 놓고 사먹을 수 없으리만치 눈물겨운 형편이었다. 요즘도 사과만 대하면 지난날 그곳에서의 궁핍했던 삶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곤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라고 했던가. 젊은 날 이런 삶의 고통은 필자를 더욱 강인하게 이끌었다. 반면 이타심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경향은 이 때 가난을 겪은 탓인가 보다.이 뿐만이 아니다.
또한 지난날 사랑했던 연인과 그 따뜻했던 손의 온기를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곳도 대전역 앞이었다. 그는 자주 필자를 만나러 대전을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돌연 곁을 떠났다.
이런 가슴 아린 기억과 추억이 깃든 고장이어서 인가. 이곳 대전만 찾으면 나도 모르게 지난 추억의 잔상을 곳곳에서 줍곤 한다.
다시금 안정애의 노래 '대전 블루스'를 입 안으로 흥얼거리노라니 애조 띤 음색에 절로 가슴이 뭉클해 온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LP 판을 틀었다.  
그리곤 서툰 몸짓이지만 이 노래에 맞추어서 한바탕 블루스를 다시 춰봤다. 그러자 이 노래가 한창 유행이던 1950년대 그 시절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상상으로 그려진다.
6,25 전쟁 이 후 특유의 찰라주의와 허무주의에 편승하여 서양 춤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때 시대상도 흐르는 노래의 리듬 위에 오버랩 되었다. 그 속엔 포마드로 올백 및 리젠트 머리로 멋을 한껏 낸 신사들을 비롯, 젊은 제비족들 모습도 떠올려졌다.
그 당시 아프레게르(전후파) 기질을 지닌 젊은 여성, 여대생들 그리고 유한마담들을 부둥켜안고 춤의 스텝을 숨가쁘게 밟으며 열기를 토했을 그들 아니던가.
오죽하면 문학 역시 이를 그냥 비켜가지 않았다. 1954년 1월 1일부터 그해 8월 9일까지 서울 신문사에 연재됐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 부인'이 그것 아니던가. 춤은 사교의 한 방편이 되기도 했지만 그 역기능으로 불륜을 부추기는 매개체 역할도 도맡았다.
정비석의 소설 내용만 하여도 춤바람이 난 대학교수 부인 오선영 여사의 탈선을 통하여 그 시대에 벌어졌음직한 타락을 엿볼 수 있잖은가.
이러한 춤이련만 이것을 필자가 배우려고 꿈꾸는 것은 심신의 정서 함양과 건강을 위해서다. 이 말이 합당한 답이 될지는 독자 몫으로 남길까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가슴은 결코 식지 않아 늘 뜨거운 온도를 잃지 않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