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을 읽습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열네 살 소년 죄지르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다른 유태인 소년들과 함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갑니다.
아우슈비츠를 거쳐 독일 부헨발트와 차이츠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독일이 전쟁에서 지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생기 넘친 소년이던 죄지르는 수용소 생활 1년 만에 혹독한 환경에서의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야위고 병들어 노인처럼 변한 모습으로 집을 찾아갑니다.
소설은 실제로 죄지르처럼 열네 살에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차이츠에 강제 수용되어 겪었던 작가의 참혹한 시간들을 덤덤하게 그러나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부모의 보호 아래 살던 10대의 중산층 소년은 항상 죽음이 동행하는 수용소 생활에서 다른 수용자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한 끼 양식으로도 턱없이 모자라는 배급된 빵을 저녁까지 적절하게 배분해서 먹는 요령도, 감시의 눈을 피해 잠깐이나마 중노동에 지친 몸을 땅바닥에라도 뉘어보는 요령도 배웁니다.
독일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 소년은 깔끔하고 절도 있는 독일 군인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최악이라 절망하기보다 일상생활이라 받아들입니다.
일 년만에 돌아오니 소년이 살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가깝게 지내던 이웃 노인들이 소년을 맞아주며 아버지가 수용소 생활 중에 죽었다는 것과 새엄마의 재혼을 알려줍니다.
딱한 처지가 된 소년에게 노인은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끔찍했던 수용소의 일들을 다 잊으라고 위로합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삶을 사는 데 무거운 짐이 된다고 말하면서요.
그러나 소년은 삶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새로운 삶이란 없으며 자신은 주어진 운명 속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어왔다 말합니다. 걷기 전에는 몰랐지만 걸음을 시작하면서 분명히 알게 된 운명을 정해진 단계에 따라 정직하게 끝까지 걸어서 여기까지 왔고 그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역경과 끔찍한 경험 속에서도, 예를 들면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잠시의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대부분의 글은 공통적으로 유대인은 독일인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이며 독일인은 저주받을 가해자라는 일관된 시각을 가집니다.
걸음을 시작하기 전에는 따뜻하고 다정했던 이웃 노인들은 삶은 연속적이고 원인과 결과라는 소년의 생각에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등을 떠밀어냅니다. 소년의 이 생각에 노인들이 그랬듯이 어떤 독자는 분노하고, 어떤 독자는 당황스러워 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지는 분명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가해자에게 당연히 드러내어야 할 분노와 복수심을 작가가 외면한다고 비판하지요.
사실 이 소설 역시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삶을 파괴한 야만적 시대를 고발한다는 점은 기존의 홀로코스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강제수용소에서의 고통을 철저히 객관화해서 묘사했듯이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보는 시선도 명징(明澄)하지 않다는 점이 피해자인 독자들을 분노케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작가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매몰되기보다 홀로코스터를 겪은 후에 삶이 어떻게 왜곡되고 고통 받는지,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와 앞으로 계속 걸어갈지에 더 관심을 기울일 따름입니다.
궁극에는 생각의 범주가 다르지 않을 터지만 피해자로서의 과거를 놓지 못하는 유태인 독자들과 이에 비해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 할 미래에 더 비중을 둔 작가의 생각 사이의 간극에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놓인 것 같습니다.
1970년대에 발표되었고, 외국소설임에도 자기만의 고정된 시선을 고집하는 두 입장을 읽는 동안 기시감(旣視感) 비슷한 걸 느낍니다.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어쩐지 낯설지 않습니다.
벽은 '보호'를 함축하기도 하지만 '분리'라는 의미도 연상하게 합니다. 둘러쳐진 벽 안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에게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껴 입장을 더 공고히 할 힘을 얻게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달리는 생각들에 더욱 박차를 가해 사고의 편향이 심화될 위험도 있습니다. 그들 끼리끼리 생각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확인시키면서 벽 너머의 다른 소리는 차단합니다.
불화와 분열의 충분조건을 갖춥니다. 둘러싼 벽에 자신들의 일방적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면 그것을 복제된 자신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보내는 지지와 호응이라는 궤변에 빠지며 불통(不通)은 점점 심화됩니다.
소년 죄지르와 이웃 노인 중 어느 쪽이든 먼저 자기 생각의 벽을 깨고 대화를 시도할 때 두 입장 사이의 분열이 메워지며 진정 홀로코스트를 극복할 힘을 얻지 않을까요?
요즈음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분열이 엄연하고 독선이 쌓는 벽은 점점 높아집니다. 불안과 위기감이 사람들 속으로 퍼져갑니다. 벽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누가 먼저 벽을 깰 시도를 할까요?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