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면 쪽마늘을 다듬는다. 모서리마다 한 개씩 붙어 있는 것으로, 지난겨울 김장을 담글 때 쪼개놓은 것들이다. 다듬을 때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톱 밑이 아플 지경이나 그만치 단단해서 겨우내 먹어도 탈이 없다. 쪽이 큰 마늘은 푸석푸석 썩는 게 일이어도, 앙바틈한 쪽마늘은 깔축없이 겨울을 난다.
무치거나 볶을 때도 일일이 쪼개야 되는 큰 마늘보다 곧장 양념을 할 수가 있다.
쪽이란 왼쪽 오른쪽의 방향과'쪽을 못 쓴다'고 하듯 기(氣)를 나타내고 작다는 뜻도 있다. 쪽마늘은 보통 쪽방에 앉아서 까게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좋은 마늘 같으면 우정 시간을 잡게 되지만 쪽마늘은 큰 방 옆의 작은 방에서 다른 일 하는 틈틈이 시간을 잡아도 충분하다.
내가 쓰는 쪽방도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글을 쓰거나 뭔가를 생각할 때마다 안성맞춤 자리다. 작지만 썩지 않는 쪽마늘처럼 작은 만치 아담한 공간에서 감성을 표백하고 삶을 직조한다. 어떤 공간이든 전체보다는 치우친 쪽을 좋아한다. 쪽으로 시작되는 쪽김치 쪽마루는 물론 쪽문 쪽밤도 있다. 그 외에 쪽배와 쪽반달 역시 얼마나 귀여운 말일까.
김장배추를 씻다 보면 고갱이가 잘 떨어져 나간다. 많이 담글 때는 고갱이라도 지레 짠지를 해도 될 만치 많아지고 그것을 버무린 게 쪽김치다. 주로 속백이 김치가 끝난 후 하는데 고갱이를 한 번 더 씻어 티겁지를 고른다. 물기를 짠 뒤 하나씩 펴서 얼갈이배추 서너 폭을 썰어 넣고 양념에 버무린 뒤 채나물로 속을 박아 오지항아리에 담는다.
간이 배면 어머니는 할머니께만 따로 담아 드렸다. 흑임자까지 뿌린 쪽김치는 정갈했다. 툭하면 역정을 내던 할머니 또한 당신을 위해 만든 정성을 읽었는지 김장철을 전후해서는 까탈을 부리지 않으셨다. 착 붙은 마늘쪽이 단단하듯 떨어진 잎을 버무린 쪽 김치는 그렇게 특이했다.
김장을 할 때마다 쪽김치는 내 거라던 할머니의 명당은 쪽마루다. 거동이 불편하셨는데도 양념을 넣고 소금을 뿌릴 때마다 잔소리가 빠지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고역이었겠지만 여느 때는 우리 딸들의 아지트다. 대청마루에서는 시끄러운 소리만 나도 꾸중을 들었으나, 쪽마루에서는 뜨개질을 하고 공기놀이를 해도 괜찮았다. 널판 두어 개를 잇댄 비좁은 마루다. 툭하면 공깃돌이 튀어 나갔으나 대청마루보다 애틋한 느낌이었다.
김장철이 되고 메주를 쑬 때마다 붙박이로 앉아 계시던 할머니처럼 어머니도 지금 그렇게 한 몫 거두신다. 양옥이라 쪽마루는 없고 대신 들마루에 앉아 계시지만 일러주는 대로 해야 괜찮은 만큼 가능하면 말씀을 듣는 편이다.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나와 계시던 할머니가 몇 해 후 돌아가신 것처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한 탓이다.
마늘을 놓고 서리태를 털다 보면 김치도 맛이 든다. 언니가 쪽문을 드나드는 건 그즈음이다. 가끔 고구마를 꺼내고 동치미도 퍼 갖고 나간다. 바느질을 하던 엄마는 잠들었는지 안방은 조용하다. 마을 간 아버지도 늦게 오시면 그대로 주무시기 때문에 언니는 동무네 집에서 느긋하게 놀고 있다.
구진할 때는 밤을 꺼내 먹는다. 밤마실 나간 언니가 몰래 갖다준 것인데, 먹다 보면 쌍동밤이 나온다. 토실한 놈 곁에 들러리로 빌붙어서 쪽밤이라고 시답잖게 생각하지만 먹어 보면 맛있다. 얼마 후에는 똑똑 들창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바로 열어주면 언니는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자는 척 시치미를 떼곤 했다.
초저녁에 잠근 대문은 삐걱 소리도 요란해서 늦은 시간에는 아버지 외에는 누구도 열고 들어오지 못했다.  
밤마실을 즐기던 언니에게는 참 요긴했던 그런 문이 지금은 없다. 안채 바깥채가 따로 없는 아파트나 단독주택의 현관문은 소리까지 요란해서 주눅이 든다. 늦도록 다니는 것은 야단맞을 일이나 까치발로 드나들던 스릴감 때문에 쪽문은 비상구였다.
덩치가 크면 빠져나가기도 힘든 문이 그립다. 쪽밤을 꺼내먹은 자리처럼 빠져나간 꿈도 아쉽다. 너무 멀리 가 버려서 빛까지 바랬으나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 보는 추억담이 잡힐 듯하다. 이루어진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고 했던가. 살짝살짝 드나들면서 볼일을 챙기듯 남몰래 키우던 소망이 알밤만치나 꽉 차 있는 걸 보면.
겨울밤은 길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나도 깨어 보면 열 시가 채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책을 읽다가 무료해질 때는 광에 가서 사과를 꺼내 먹는데, 그때 본 달이 천연 쪽배다. 반달이 되기 전의 오목한 모습과 흡사했다. 그래 나무토막을 파내서 만든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쪽배라고 이름 붙였을 것 같다.
구름 속에서 쪽반달은 잘도 떠갔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흩어질 때는 달까지 속력을 탄다. 험한 삶의 강에서, 먼 서쪽 나라도 잘만 가는 조각달 쪽배처럼 우리 또한 돛대도 달지 않고 삿대도 없이 가는 쪽배마냥 운명의 바람에 휩쓸리곤 했다. 삿대가 있고 돛이 멀쩡할 때는 태풍에 시달려도 부러지고 꺾일 때는 순풍이 불기도 한다. 역풍에 회오리에 혼란스러울 때도 고비만 잘 넘기면 원위치로 돌아오는 것은 물론 푸른 하늘도 볼 수 있다.
강도 아닌 그 강을 헤쳐 가는 것은 동생이 만든 쪽반달이다. 댓개비를 가로세로 맞추어 뼈대를 삼고 창호지를 바른 뒤 두 가지 빛깔의 종이로 반달 모양의 꼭지를 만들어 붙인다. 꼬리연이나 방패연 등 많은데 이름도 고운 쪽반달을 만들 때는 계집애처럼 예쁘장한 모습과 딱 어울렸다. 연을 띄울 때는 뗏목 같은 쪽반달이 동생의 꿈을 태워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얼음이 얼 것처럼 짱짱했던 하늘 물결에 반달 모양의 무늬만 남곤 했다.
얼레가 풀리고 가물가물해지면 꽁무니 달려 있던 꼬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람에 갈팡질팡 가랑잎처럼 날릴 때는 항로를 잃은 채 표류하는 배처럼 보였으나 침착하게 얼레를 조정하는 걸 보면 마음이 놓였다.
얼레를 되감을 때 진눈깨비가 뿌리면서 장식으로 붙인 꼬리와 댓개비가 떨어지고 후줄근해졌으나 결국 돌아왔다.
얼마 후 동생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살았으면 오십 초반일 테지만 내게는 아직 고등학생 때 모습으로 생각난다. 세상에 없다 해도 그때 띄운 꿈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다.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으나 눈보라가 칠 때도 쪽반달은 탈 없이 돌아왔다. 무늬로 붙인 반달도 밤마다 떠오르는 연이다. 누군지 초저녁에 띄웠다가 새벽녘 되감는 쪽반달이다. 삿대가 꺾이고 돛대가 부러질지언정 삶의 쪽배는 표류하지 않는다. 꿈도 그렇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배운 소중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