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테헤란로(강남역~삼성역)의 원래 이름은 삼릉(三陵)로였다. 삼릉은 조선 성종과 정현왕후가 합장된 선릉과 아들 중종 묘의 봉분인 정릉을 합친 말인데, 1972년 서울시가 이 길을 낼 때 인근에 삼릉공원이 있다 해서 삼릉로라 이름 지었다. 삼릉 길이 지금의 도로명으로 바뀐 것은 1977년 6월 팔레비 2세의 측근인 골람레자 닉페이 테헤란 시장의 한국 방문이 계기가 됐다. 닉페이 시장은 서울시와의 자매결연식에서 우의를 다지자는 뜻에서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두 도시에 서로의 이름이 들어간 도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중동전쟁이 초래한 오일쇼크로 안정적인 석유 공급처가 필요했던 정부는 흔쾌히 동의했고, 그렇게 해서 삼릉로가 '테헤란로'로, 테헤란의 메라트공원로가 '서울로'로 바뀌게 됐다. 두 시장이 맺은 친선 결의는 2년도 가지 못했다. 1979년 1월 황실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한 이란 민중의 궐기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테헤란 시장을 거쳐 상원의원이 된 닉페이는 혁명재판소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서울에선 대통령 박정희가 고향 후배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어 유신정권이 무너졌고, 권력 공백을 틈 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 내란을 일으켜 군사독재의 길을 열었다. 박정희의 모교인 대구사범(경북대 사대 전신) 출신으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구자춘은 서울지하철 2호선을 건설하고 내무부 장관이 돼 승승장구하다 전두환의 집권으로 정치규제를 당했다.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한 루홀라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국과 이란 관계는 대리대사급으로 격하됐다. 한국은 외교에서 미국 편을 들면서도 경제 면에선 원유대국 이란과 동맹에 버금가는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테헤란로가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로로 성장하는 사이 테헤란에선 기아차의 '프라이드'가 서울로를 누볐다. 이스라엘의 공습 세례에 테헤란이 시민들의 피란 행렬로 텅 비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테헤란 서부의 진출로인 서울로도 어떤 모습인지 짐작이 간다. 불야성인 강남역 네거리를 보며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