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삼국유사 흥법편에서 후대의 지명인 동경을 소환해 신라 성인 열명을 거론한 것은 고려불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소위 '동경 흥륜사 금당 십성'이다. '동쪽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소상은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이고 서쪽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소상은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다' 일연은 인물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름만 나열했다. 그러나 흥법편에 십성을 끼워넣은 의도는 이들이야말로 신라에 처음 불교를 안착시킨 창시자요 흥법의 건설자이며 신라불교의 완성자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신라불교의 흥법과정에서 초석을 놓은 인물로 원광과 자장을 들 수 있지만 원광은 십성에 끼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이적을 보인 명랑을 비롯 혜통 밀본같은 뛰어난 승려들은 빠져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후 무수한 승려들 중에서 언제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선정해 왜 흥륜사 법당에 안치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흙으로 빚었다는 정도이며 법당의 주부처인 미륵부처를 중심으로 좌우에 종대로 배치한 것 외에는 배치순서도 알 길이 없다. 십성의 선정기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속에 녹아있는 인물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첫째는 십성들의 특성과 활동시기다. 경덕왕시절 천궁을 오가며 상제와 회통하고 경덕왕의 아들을 점지한 이후 신라에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가장 후대의 인물은 표훈이다. 반면 활동시기상 가장 빠른 인물은 아도로 신라에 불법을 전파한 설화속의 인물이지만 십성의 반열에 올랐다. 의외의 인물은 원효와 친분이 있는 사파로 알려진 행적이 없어 일연조차 평가절하한 인물인데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순교자인 이차돈(염촉) 역시 왕의 비서직인 사인의 직책을 가진 관리이지만 당당히 십성에 올랐다.   두번째는 십성의 기준과 소상을 제작한 시기다. 학계에서는 십성을 흥륜사에 모신 시기를 신라 하대인 헌덕왕 흥덕왕대로 보고 있다. 헌덕왕 9년 817년에 이차돈에 대한 숭모사업의 일환으로 순교기념비가 건립된 것을 볼때 불교계내에서 구심점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흥덕왕대에는 진감선사와 혜소 도의 범일 등 선종 세력이 부상하는 시기로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한 구산선문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시기상으로 볼때 십성의 선정 기준은 수많은 고승 대덕중에서 당연히 화엄사상계의 인물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세속오계와 걸병표 등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원광이 십성에서 빠진 이유를 밀교와 관련짓기도 한다. 밀본을 비롯 혜통 문두루비법의 명랑 진표 등 모두 밀교승이다. 삼국유사의 원광서학에 나오는 설화가 토속신앙이 불교로 수용되는 과정을 담고 있듯이 삼기산에서 신의 도움으로 유학을 갔다 돌아와 왕의 병을 고쳐주는 등 이적을 행하는 것도 점찰경에 의한 참법신앙으로 밀교의 영역이다. 원광의 부도탑이 있는 금곡사는 밀본이 거주한 사찰로 원광의 밀교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는 왜 흥륜사에 모셨을까. 흥륜사는 527년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대인 535년 절을 짓기 시작해 진흥왕 544년 완공된 신라 최초의 국가 사찰이다.후대의 신라인들이 황룡사와 영묘사 분황사 등 무수한 왕실사찰을 뒤로하고 흥륜사에 성인 열명을 모신 것은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점에 방점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번째는 일연은 왜 서울이라는 의미의 경사(京師) 경도가 아닌 동경이라는 후대의 지명을 넣어 신라 성인을 소개했을까. 이는 일연 당시 만연해 있던 고려불교계의 잘못을 신라와 대비하기 위해 동경 흥륜사라 했을 수 있다. 충렬왕 전후의 시기는 파계승이 난무하고 돈을 주고 승직을 사고파는 혼란의 시기였다. 불법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려는 대장경편찬사업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의 일탈이 불교계를 잠식할때 신라의 흥법을 주도한 인물들은 이들에게 반면교사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동경 흥륜사 금당 십성'의 의미는 일연이 당시의 고려 불교계에 대해 각성을 촉구하는 준엄한 메시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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