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으로 ‘마의 30분’ 벽을 처음으로 깼다.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가슴에는 일장기가 붙어 있었고 시상식장에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다. 국내 언론은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흐리게 하거나 지워 보도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떠들썩했지만 손기정은 며칠 뒤 작은 엽서에 'Korean(코리안) 손긔졍'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우승 직후인 1936년 8월 15일에 직접 서명한 엽서 실물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달 25일부터 상설전시관 기증 1실에서 선보이는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를 통해서다.
박물관 관계자는 "조국을 가슴에 품고 달렸던 손기정 선수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제자들, 1988년 서울에서 성화를 봉송했던 순간 등을 담았다"고 전했다.
 
전시는 손기정이 기증한 보물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특별 부상이었던 투구와 금메달, 월계관, 우승 상장, 신문 기사 등 총 18건을 모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처음으로 함께 전시하는 자리다.
여러 전시품 가운데 손기정의 서명이 담긴 엽서는 주목할 만하다. 박물관에 따르면 손기정은 자신이 일본이 아닌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사인해 줬다고 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1936년 8월 15일 작성한 엽서와 관련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올림픽 정신을 나눔으로 이어간 청동 투구 또한 인상적이다. 청동 투구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가 올림피아에서 발굴한 것으로 전한다.
당초 투구는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하게 돼 있었으나 손기정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돼왔다.
이후 오랜 노력 끝에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손기정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인 1987년 보물로 지정됐다.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투구를 기증했다. 투구는 현재 상설 전시 중이다.
전시에서는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한 '그날의 영광'도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은 1936년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청년 손기정의 모습부터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노년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어려운 시대 상황에도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 손기정 선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의 뜨거운 의지와 신념을 되새기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