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여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독립유공자 이강년 선생의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 중.    올해 8월 15일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날이다. 처음으로 외세에 통치권을 빼앗긴 불행한 역사를 이겨내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강점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인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희생과 헌신이 더욱 소중해지는 시기다.   풍찬노숙했던 독립유공 선열들을 소홀히 여기고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도리가 아니다. 독립유공자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때다.   경북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 없이 홀대받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선열을 더욱 발굴해 명예를 선양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자 우리 후대가 해야 할 책무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일컫는 독립유공자들은 주로 국채보상운동, 신간회,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6·10 만세운동, 광복회, 일장기 말소 사건, 한국광복군, 13도 창의군 등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이들이 대부분이다. 즉 일본의 국권 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본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이들이다.    국가보훈부에 의하면, 서훈 등급 보훈 심사 기준은 전문 학자들이 우선 심사한다고 한다. 옥고의 정도, 독립운동 활동 기간, 활약 공적 등을 기준으로 보훈심사위원들이 심사하는 것이다. 당시의 행정 편제가 지금과는 달랐고 독립유공자 등록 기준은 당시 유공자의 호적상 본적 중심으로 이뤄졌다.   2025년 현재, 국가보훈부가 서훈한 전국 독립유공자는 1만 8258명이다. 그중 경북 35개 지역이 본적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2522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경북 이외는 서울 482명, 강원도 676명, 경기도 1532명, 경남 1476명, 전남 1530명, 전북 1148명, 충북 591명, 충남 1767명, 제주도 197명 등이었다.   경북도내 지역별로 살펴보면(가나다 순) 경산 59인, 경주 56인, 고령 57인, 구미 2인, 군위 27인, 김천 59인, 달성 66인, 대구 126인, 문경 89인, 봉화 82인, 상주 78인, 선산 28인, 성주 88인, 안동 392인, 영덕 230인, 영양 64인, 영일 90인, 영주 100인, 영천 54인, 예천 116인, 울도(울릉도) 1인, 울진 86인, 월성 9인, 의성 179인, 청도 64인, 청송 120인, 칠곡 137인, 포항 1인, 지례 2인, 경북 기타 55인, 미상 4인, 순흥 14인, 풍기 3인, 흥해 1인이었다.   안동, 영덕, 의성, 칠곡, 대구 등의 순으로 안동에서의 독립유공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의 포상 훈격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 포장, 대통령 표창의 순으로 나뉜다.   경북의 대한민국장으로는 김창숙, 이강년, 허위 3인이고 대통령장은 김동삼, 김지섭, 박열, 신돌석 등 9인, 독립장은 권오설, 남석인, 송종익, 이석, 홍사구 등 79인, 애국장은 강봉학, 권해운, 김무열, 송상도, 최익무 등 433인, 애족장은 강대근, 안달득, 최준, 황정연 등 955인, 이외 건국포장 311인, 대통령 표창 732인으로 나타났다.   한편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는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토대로 한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1949년부터 시작된 정부포상 결정문으로 최소 70여 년 전의 일제강점기 판결문 등 근거자료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한자가 많이 쓰여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기간의 공적 및 주요활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문가의 집필을 통해 책으로 발간된 내용이다.   이를 바탕으로 경북도에서 최고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한 독립유공자는 김창숙, 이강년, 허위 선생으로 3명이었다.   ▲김창숙 선생(1879~1962)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에서 김호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서 시작됐다.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즉시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서 활동, 사립학교를 세워 민족주의교육도 병행했는데 유림들을 모아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각 신문에 발표해 일경(日警)에 다시 체포, 옥고를 치렀다. 이어 1910년 영남·호남·호서의 유림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케 했다. 또 상해에서 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중공동 항일 운동을 추진토록 했다.   1924년부터는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독립군을 양성, 1926년 동양척식회사를 폭파케 하고 1927년 입원 중 일본 밀정에 발각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다. 또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재투옥됐다.    출옥 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을 주동해 재차 투옥되는 등 그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됐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했다.   ▲이강년(1858~1908) 선생은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이기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때 동학군에 투신, 1896년 의병을 거느리고 고성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했다. 1907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돼 제천에서 재봉기해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했다.   특히 1907년 7월 제천 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해 사기가 충천했으며 이어 경상·강원·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1908년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 백담사의 전투와 안동 서벽 전투, 4월 6일 봉화 내성 전투, 4월 8일의 안동 재산의 전투를 들 수 있다.   선생이 10여 년간에 걸친 의병활동에서 비견될 바 없이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에 이송돼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51세를 일기로 순국했으니 그의 애국충정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허위(1854~1908) 선생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으로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출신자로 참여했다.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 경륜도 있었으며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旧本新參)의 개화 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이었다.    1899년 영희전 참봉을 제수받고 1904년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시무10조를 건의하는 등 개화적 면모를 보였다. 또 이후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으로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 발족 후 연합 의병의 총대장이 된 허위는 그 후 계속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을 정하고 군표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를 제조하게 했다. 1908년 5월 체포돼 10월 21일 교수대에 올라 51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총대장 허위가 순국한 후에도 의병들은 더욱 고무돼 게릴라 항전을 보다 강력하게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지역의 한 인사는 “해가 갈수록 점차 서훈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음은 반길 일이다. 그분들 모두 공훈이 골고루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하지만 후손의 영향력이나 역할에 따라 공훈이 다르게 알려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매우 늦은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고귀한 이들의 공훈은 물론, 아직 서훈되지 못한 유공자들이 더 늦기 전에 발굴돼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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