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인데도 광복절이면 학교에 가서 기념식을 하고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만세를 외치고는 마쳤다.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1910년 12월 ‘이회영(우당友堂 1867~1932) 육 형제’는 전 가산을 정리해 약 40여 만 원(현재가 쌀 값으로 환산 600억 원, 땅 값으로는 2조원)과 쉰 여 명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들은 서울 명동, 개성, 양주, 평택 등의 땅을 소유한 재력가로,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사용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설립명 신흥강습소, 1911. 6. 10~1920. 7 )를 세워 무장투쟁을 위한 무관을 양성했다. 재산은 교육, 식량, 무기 등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곳에서 홍범도, 김좌진, 나석주, 김원봉, 지청천 등 35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였다. 이후 학교 운영에 자금은 바닥났고 이회영의 아들 규창에 따르면 1927년경에는 끼니거리 조차 없었다고 한다.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국 군사 동맹과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미국은 초기에는 중립국으로 있었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여,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는 참전을 선언한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권총으로 자살하고 5월 2일 베를린은 소련군에 함락된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1904~1967)를 소장으로 한 연구팀은, 극비리에 ‘맨하튼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기반으로 한 우라늄, 플로토늄의 원자핵 분열을 이용한 폭탄으로 인류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가 뇌출혈로 사망하자,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만(Harry S. Trueman)’은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허가한다.8월 6일 티니언섬 (사이판)을 이륙한 B-29는 1차 목표를 히로시마로, 만일 기상이 흐리면 2차 고쿠라 (당시 군수 기지가 있던), 예비로 나가사키를 향해 날아간다. 8시 15분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Little Boy)가 폭발했을 때, 중심 온도는 섭씨 100만 도에 이르렀고 백열 상태의 버섯구름이 만들어졌다. 그 해 12월까지 사망자 수는 14만 명이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Fat Man)’이 떨어져 사망자가 9만 명에 달했다. 원래 표적은 고쿠라였으나 그 도시는 짙은 구름에 가려 나가사키로 날라갔다. 폭탄이 터진 상공은 진주만 공격에 사용된 어뢰를 생산했던 미쓰비시 군수 공장 위였으니, 그렇게 전쟁은 원을 그렸던 것이다.8월 15일 오후 일왕 히로히토는 항복을 선언하고 우리는 갑자기 광복을 맞는다. 카미카제 자폭까지 감행하던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다. 온 국민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며 감격한 것도 잠시, 지배층이 없어진 한국 사회는 혼란 자체였다. 8월 26일 미군정(Military Government : MG)이 시작되어, 삼 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다. 해방을 맞자 제일 먼저 한 것이 35년 일제의 청산이었고 1948년 5월 10일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조직된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1946년 한간(漢奸 : 민족 반역자) 재판을 단행했다. 프랑스 드골 정부 또한 독일의 파리 점령 시(1940. 6~44. 8) 나치 협력자 대숙청을 단행했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1883~1971)’ 은 독일 점령시, 외교관 ‘한스 딘클라케’와 친분이 있었다는 죄명으로 ‘스위스’로 망명 (1944~54) 해야 했다. 그녀는 ‘로젠’에서 일흔 한 살에야 고국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어떤 죄명이 아님에도 처벌은 혹독했다.반민특위는 이후 기득권의 반발, 공산주의자 매도, 친일 행위 항변 및 애국 반론과 특위요인 암살 협박 등 방해공작과 이승만 대통령 지시에 의한 경찰의 습격 사건, 김구 암살(6. 29) 등으로 위축되어, 반민 피의자 688명 중 15명만 남기고 1949년 8월 31일 해체된다.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을 배반하고 동포를 고문 했음에도 없었던 일로 넘어가자, 후일에도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친일 경찰이 승진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친일로 막대한 부를 누린 사람들은 지금도 후손들이 재산 반환 소송을 한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는 세상’ 이 된 것이다. ‘국립 현충원’에는 독립운동가 묘소 위에, 친일 인명 사전 등록된 쉰여섯 구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묘가 있다. 그들이 이후 국군 요직에 오르고 장성에도 올랐기 때문이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지나온 대가는 오늘도 후유증이 남았다.명동 1가 1번지에 이회영, 이시영 집터 표지석이 있다. ‘독립운동가 李會榮, 李始榮은 1910년 건영, 석영, 철영, 호영 4형제와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회영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시영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태극기를 드높이 걸 수 있는 기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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