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혼(回婚)은 부부가 혼례를 한 후 60년을 동행하며 살아오면서 수하들이 탈 없이 장성할 때 맞이하는 뜻깊은 기념일이다. 일운(一云) 회근(回巹)이라고 하며 유교적인 예속의 하나이다. 
 
어느 시대부터 행하여졌는지 문헌상으로는 잘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문벌이 높은 집안에서 행했으며, 최근까지도 행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거나, 이미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회혼을 맞으면 나라에서 술과 음식이나 옷감 또는 궤장(几杖), 안석(安席)을 내려 축하하였다. 안석은 방석이고 궤장은 일어설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3대 수연(壽宴)을 회갑, 회방(回榜), 회혼이라 하였다. 회갑은 나이 60주년, 회방은 과거에 급제한 지 60주년, 회혼은 결혼 6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 때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결혼과 관련하여 올리는 예식에는 결혼 1주년에 지혼식, 2주년 고혼식, 4주년 혁혼식, 5주년 목혼식, 25주년 은혼식, 50주년 금혼식, 60주년 회혼례 혹은 회근례, 75주년 금강혼식, 100주년 백년해로가 있음이 전해온다.
1900년 이전 세대는 대체로 회갑 이전에 종생을 맞는 경우가 많아서 회갑을 맞이하면 자녀들이 친척 친지를 초빙하여 잔치를 열어 부모님께 헌수 즉 술잔을 올리고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러나 회혼례는 당시 15세 전후에 혼례를 하므로 회혼례를 올리려면 부부가 함께 75세 이상 향수하여야 하고 자녀들에게 흠결이 없어야 하므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은 결혼하는 나이가 30세 후반을 넘고 있으니 회혼을 맞이하려면 부부가 함께 90세 이상이 되어야 하니 평균 수명이 과거보다 늘었다고 하나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2025년 기준으로 회혼례를 맞이할 수 있는 경우는 평균적으로 여자는 1941~1944년생, 남자는 1938~1942년생이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보면 남자의 경우 대다수가 사망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여자만 생존한 경우가 많아 회혼례를 맞이하는 경우가 희박하다.
필자의 경우, 84세 동안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친인척과 이웃에 회혼례를 올리는 경우는 단 한 번 있었다. 그것은 2005년에 거행된 청구중학교 교장이셨던 하정진 재종자형 내외분의 회혼례였으니, 회혼례는 흔하지 않은 의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구 어느 호텔에서 거행된 이 회혼식은 자형과 누님이 각자 새로 맞춘 전래의 예복을 차려입고 사모관대를 갖추고, 원삼에 족두리를 씌워서 친구분들의 창홀에 따라 초혼례와 같이 교배례를 하면서 하객들의 축하 박수를 받으며 즐겁게 거행되었다.
특히 자녀, 자부, 형제, 종반, 재종반, 친구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의 술잔을 받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던 모습이 시야에 선명하다. 자형은 거년에 별세하셨으나 누님은 아직도 건강하게 100세를 향수하고 계시니 수하 내외의 부모지은(父母之恩) 고어산(高於山) 심어해(深於海)라. 의방지훈(義方之訓) 명념(銘念)하여 효의(孝義)를 다하고 있으니 어찌 칭송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당시에 한 구절 축시를 여기 다시 올리며 두 분 양세(兩世)의 명복을 간절히 기원드린다. 重到華婚七九辰 擧觴祈願萬年新 英才敎育平生業 聖法欽行守範人 華閥文章傳古土 天光常照帶殷春 和音琴瑟今偕樂 兩主繁榮自然眞 화혼 하는 해 거듭되는 칠십구세, 술잔 들어 만년 새롭기를 기원합니다. 영재 교육함은 평생의 업적이고, 성인 법도 즐겨 행함은 모범된 사랑입니다. 존문 문필 고향 심곡에 전하고, 하늘빛도 상시 비추어 성한 봄과 같습니다. 금슬이 화음 하여 지금 함께 즐기시니, 부부의 영광이 자연히 진실합니다. 회근례의 의의는 환갑, 칠순과 다르게, 금혼식, 팔순, 구순처럼 흔하지 않아 크게 올려 종생을 앞둔 부모의 은혜에 대한 자식의 도리라는 의례에 인식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