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조씨는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현관(顯官)과 명신(名臣)이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절신(節臣)과 학자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고려 때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代)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 뒤 6대 소감(少監)을 배출하며 동방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창녕(昌寧)의 지명 변천사를 보면 신라 때 비자화(比自火) 비사벌(比斯伐), 진흥왕 16년에 하주(下州)로, 신라 경덕왕 때 화왕(火旺)군으로 개칭됐으며, 고려 태조 때 창녕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 때 현 밀양에 귀속됐다. 조선 인조 때 현(縣)으로, 고종 때 군(郡)이 됐고, 1914년 영산군(靈山郡)의 일부로 병합했다. 창녕조씨 영천 입향조는 조신충(曺信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아내의 고향인 경북 영천 창수면(蒼水面)으로 은거했으며, 그 후손들이 영천지역에 세거하게 됐다. 명가 탄생과 득성 유래에는 이야기가 따른다. 조문(曺門)도 마찬가지다.   시조 계룡의 어머니 휘(諱) 예향(禮香)은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로, 태어나면서부터 병(腹疾)이 있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던 차에, 주위 사람들이 창녕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을 볼 것이라 말했다.    사람들의 말에 따라,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하고 지성으로 기도드리는데, 갑자기 운무가 일어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몽롱한 지경에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운무가 걷히면서 못 한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는데 그로부터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태기(胎氣)가 있었다. 그 뒤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曺'자와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하루는 꿈에 장부가 나타나서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는가?” 나는 동해 신룡(神龍)의 아들 옥결(玉玦)인데 내가 아이의 아비다.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작아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사실을 외할아버지인 이광옥이 신라 진평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이 아이를 접견해 보니 풍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자의 글 무늬가 있음을 보고 성을 '曺'라 내리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지어 주었다고 전한다. 계룡(繼龍)은 성장해 진평왕의 사위(駙馬)가 되고 창성부원군에 봉하니 곧 창녕조씨의 시조다. 昌寧曺氏는 알려진 명문가다. 고려·조선을 이어오면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수만 100여 명이 넘는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민족 지도자 고당 조만식,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죽산 조봉암(曺奉岩, 1898~1959),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재천(曺在千, 1912~1970) 전 의원, 조상호(曺相鎬) 전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과 대구광역시장을 지낸 조해녕(曺海寧), 조희대(曺喜大) 대법원장, 헤르베르트 폰 카랴얀으로부터 “신이 내린 천상의 목소리”,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인류의 자산” 등의 극찬을 받은 세기의 성악가 조수미, 세계 바둑계 최초 전관왕인 국수(國手) 조훈현, 조좌호 전 성균관대 총장, 조영곤 전 중앙지검장, 육군 해군 공군 장성과 교수, 의사, 변호사, 변리사 등 많은 인재들을 배출, 각계 각층에서 道와 德을 중시하는 명문가의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데 앞장서 오고 있다.◆ 창녕조씨 역사 속 인물   ▲조익청(曺益淸) 공민왕 묘정배향 공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좌정승에 올라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 칭호를 받았다. 시호는 양평(襄平).   ▲조신충(曺信忠) 창녕조씨 영천 입향조 목은(牧隱) 이색(李穡), 호정(浩亭) 하륜(河崙) 등과 교유. 조상보(曺尙保, 司議) 조상정(曺尙貞, 縣監), 조상직(曺尙直, 司直), 야은(冶隱) 길재(吉再) 문인 조상치(曺尙治, 副提學), 조상명(曺尙明,德源都護府使) 등 5명의 아들이 창녕조씨 명문가의 기틀을 다져 남한의 인구 중 약 60%가 여기에서 배출됐다.   ▲조민수(曺敏修) 천운을 놓쳐버린 장군 이성계(李成桂)와 요동(遼東)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창왕(昌王) 옹립을 주도하다 이성계와 대립하면서 권력에서 밀려났다. ▲조상치(曺尙治) 조선의 싱크 탱크(集賢殿)의 수장(首長) 부제학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 장원으로 급제,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가 됐다. 1424년 좌정언에 임명되고 세종·문종·단종 3대를 섬겨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조석문(曺錫文 1413~1477) 적개공신 1등, 영의정 역임, 호조판서, 영중추부사 1455년(세조 1)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할 때 가담하면서 1457년 도승지에 임명됐다. ▲조위(曺偉, 1454~1503) 사림파의 영수 성종 때의 대문장가 시호는 문장(文莊). 사림파의 종장인 김종직의 문인이며, 처남 매부지간이다.   ▲조치우(曺致虞 1459~1529) 만고의 청백리, 중종 때 옥비(玉碑) 하사 받아 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사옹원정 등을 지냈다. 아버지 말손과 자신의 아들 효연과 함께 3대에 걸쳐 한림(翰林)을 역임, 문장으로 명성을 드날렸다. 대구부사(大丘府使) 재임시에 청백리에 선정되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옥비(玉碑)를 하사받았다.   ▲조효연(曺孝淵, 1486~1530) 시문에 탁월한 재능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사위, 퇴계 이황과 종처남(從妻男) 간 이다. 15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 예조정랑, 예문관 검열 등을 역임하였다. 조부인 말손, 아버지인 치우와 함께 3대에 걸쳐 한림(翰林)을 역임하였다.▲조계상(曺繼商 1466~1543) 중종반정 공신1506년(연산군 12)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했다. 자는 종성(宗聖)이며, 시호는 충정(忠貞), 손자인 조대건(曺大乾)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예학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장인이다.▲조식(曺植, 1501~1572) 호 남명(南冥), 우리나라 선비의 표상이며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 시호는 문정(文貞)실천이 수반되지 않은 학문은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문하에서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여 실천 유학의 표본이 된 대학자,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조광익(曺光益 1537~1580)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1576년 重試에 장원급제했으며 '취원문집'(聚遠文集)의 저자,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동생인 조호익이 평안도 강동에 유배되자 평안도 도사를 자원하여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조호익(曺好益, 1545~1609)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으로부터 부자(夫子: 공자처럼 학덕이 뛰어난 인물을 말함) 어필을 받은 안과 밖이 일치한 선비의 표상 최황(崔滉)의 무고로 평안도 강동 지역에 17년간 유배를 당하였으나 이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켜 선조(宣祖)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 평안도지방) 어필을 하사받았다. 문하에 잠곡 김육, 합강 박대덕 죽창 이시직 등 문인들을 양성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리고 영천에서 50여명의 문인들을 양성, 남과 북에서 지산학파를 형성하였다. 지산집(芝山集)·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등의 저서가 있다. 호는 지산(芝山), 시호는 문간(文簡), 영천의 도잠서원과 성천의 학령서원, 강동의 청계서원에 제향. ▲조탁(曺倬, 1552~1621) 임란 후 피폐해진 서정에 대한 시무 10책 개진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선조 32) 별시 문과 장원급제.   ▲조우인(曺友仁, 1561~1625) 詩 書 樂 뛰어나 1605년에 문과에 급제, 1616년(광해군 8)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그의 가사집 이재영언(頤齋詠言)에는 매호별곡(梅湖別曲)·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한다.   ▲조한영(曺漢英, 1608~1670) 庭試 문과 장원급제청나라가 원손을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린 것이 청나라에 알려져 1641년 심양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도 했다.   ▲조문수(曺文秀, 1590~1647) 왕희지 필법을 섭렵, 저서로는 '설정시집' 6권 1624년 현감으로 문과에 급제해 동부승지, 특진관(特進官)을 두루 지냈으며 (인조 23) 좌승지에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하령군(夏寧君)에 봉해졌다. 금석으로 영변의 보현사편양당대사비(普賢寺鞭羊堂大師碑), 고양의 좌상유홍비(左相兪泓碑) 등을 썼다.   ▲조명교(曺命敎, 1687~1753) 시조 묘소 찾은 학덕 뛰어난 선비자는 이보(彛甫), 호는 담운(澹雲). 현몽을 꾸고 시조인 태사 계룡의 묘소를 찾는데 큰 공로가 있는 인물. 덕행과 학문으로 선비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비문을 남겼다.   ▲조석중(曺錫中, 1763~1816)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曹字’를 ‘曺字’로 사용할 것을 통문 발송  창녕조씨(昌寧曺氏) 성자(姓字)를 종전(從前)에 2획(劃)인 조자(曹字)로 써오던 것을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하명(下命)에 따라 1획인 조자(曺字)로 환원(還元)하여 사용할 것을 팔도(八道)의 제종(諸宗)에게 통문(通文)을 보냈다. 창녕조씨 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을 편찬했으며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조석여(曺錫輿, 1813~?) 암행어사로 파견돼 삼정(三政)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건의암행어사나 지방관으로서도 많이 활약했다.   ▲조시영(曺始永, 1843~1912)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해 풍속을 교화1882년 정시문과에 급제, 홍문관의 수찬·교리·응교,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흥양·고령군수, 여산부사(礪山府使),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   ▲조긍섭(曺兢燮, 1873~1933), 영남 사림의 거목 '남명집'(南冥集) 중간 사업에 참여함.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됨. 저서로는 '후계문집'(後溪文集) 16권 8책이 있다.   ▲조만식(曺晩植, 1883~? ) 일제에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한 인물 1950년 6 · 25전쟁 당시 공산군의 평양 철수 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호는 고당(古堂).   ▲조봉암(曺奉岩, 1898~1959)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호는 죽산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그해 7월 사형이 집행됐으나 53년 후인 2011년 1월,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됐다. 저서로는 '공산주의 모순발견', '우리가 나아갈 길', '우리의 당면과제' 등이 있다. 창녕조씨 집성촌(集姓村)은 경북 영천시 금호 대창 화남 화북 일원, 경북 경산시 용성면 대종동, 경북 고령군 다산면 송곡동,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동, 경북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수리동에 분포되어 있으며 타 시도로는 충남 보령군, 전북 고창군, 전남 담양군, 전남 보성군, 전남 화순군, 영암군 일원, 전남 나주시, 전남 진도군, 경남 의령·창녕군·의창군, 경남 산청군·합천군 일원, 경남 함양군 등 외 경기도 화성시, 수원시 등에 분포돼 있다.   유적(遺跡)지는 경북 영천의 창주서원, 도잠서원, 지산고택, 청효사, 만취당, 금산당, 귀애고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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