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염(紅染)'. 오래되고 깊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천연 염색의 붉은 빛깔. 사람들은 그 빛의 색을 ‘비색(秘色)’이라 부른다. 신라 왕의 곤룡포에서, 귀족의 의복에서, 그리고 지금은 박순라 홍염장(紅染匠, 60, 홍염 전통기술 보유자)의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귀한 색이다.   지난 1일, 경주 ‘신라 염궁’ 전시·판매장에서 만난 박순라 홍염장은 붉은빛이 곱게 물든 비단 한 자락을 살며시 들어 빛에 비춰 보였다. 겹겹이 쌓인 붉은 오묘함이 천 위에서 고요하게 호흡하는 것 같았다. 박순라 홍염장과의 인터뷰에서는 40년 넘게 자료를 뒤지고 전국을 다니며 천연염색의 근원을 찾아 헤맨 장인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111년간 이어오며 4대라는 시간 위에서 묵묵히 붉은 빛을 지켜온 그는 천연염색을 우직하게 고집하고 있다. 가문의 비법인 신라의 색을 현대에 잇는 기술은 한 집안이, 네 세대가 갈고 닦아온 시간의 결과 함께 겹겹이 물들어 있는 것이다.   박순라 장인은 올해 국가유산청이 추진 중인 ‘미래 무형유산 발굴·육성 사업’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기술 보유자다. 아직 지정조차 되지 않은 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는 전통기술 ‘홍염’을 국가 차원에서 조사·기록하고 전승 기반을 마련하도록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신라 염궁(染宮)'에서 이어져 내려온 장인의 후손이라 말한다. “신라 염궁은 신라 시대 왕실 산하의 염색 기관이었습니다. 왕의 곤룡포부터 대신과 관료들의 옷 색까지 모두 관장하는 곳이었죠. 얼마나 정교했는지, 색에 등급이 있었고 왕에게만 허락된 색도 있었어요”   그는 지난 40년간 신라염궁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천연 염색의 재료와 기법 등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고증된 전통기술을 재현하고 전승하기 위해 오늘도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전통 방식’은 생각보다 훨씬 극단적이고 고된 과정이다. 홍염의 핵심 재료는 ‘홍화’다. 6월, 손톱만 한 꽃잎을 일일이 따서 말리고, 잿물·홍매실·한약재·오미자·지하수·숯을 오랜 시간 달여 매염제를 만든다.    그리고 100% 명주 원단을 천천히, 부드럽게 적신 뒤 붉은 기운이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진짜 비법은 그 다음이다. 36~38회 반복 염착. 그늘에서 말리고 다시 담그고, 또 말리고...,이러한 ‘반복’이 그 비색을 만들어낸다.   홍화가 품고 있는 노랑·주황·붉음을 분리하고 그중 가장 깊은 색만을 끌어내는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장인의 감각이다. 이 비법은 오로지 한 집안의 111년 전통 속에서만 전해져 왔다. 1913년, 1대 박명애 여사로 시작된 전통은 2대 박정희(시어머니)를 거쳐 3대 박순라로 이어졌고 지금은 4대 신소연에 전해지고 있다.   한 가문이 100년 넘게 같은 기술을 지킨다는 것은 전통기술의 세계에서도 드물고 천연염색 분야에서는 거의 유일하다.특히 3대 박순라의 시기는 기술이 단절될 뻔했던 위기였다. “정말 맥이 끊길까 봐 무서웠어요. 신라 시대의 기록을 모두 다시 찾아가며 고증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난 40년간 신라염궁에 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천연 염색의 재료와 기법 등에 대한 연구개발을 위해 경주 지역은 물론 전국의 산야와 계곡 등을 다니며 기록 속 천연재료들을 찾아다녔고 전국의 유명한 천연염색 장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것들을 검증하는 절차를 거쳤다.    또 고서인 임원경제지, 산림경제, 규합총서 등 천연염색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등 지난한 노력을 해왔고 드디어 오늘날과 같은 신라염궁의 대표적인 ‘홍염장’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신라의 색’을 되살리기 위한 작업은 지금까지 하루도 멈춘 적이 없었다.   한국인의 미적 감각과 자연관을 품은 '비색'은 세계가 먼저 알아봤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보다 먼저 이 기술을 알아본 곳은 세계적인 명품사 ‘샤넬’이었다. “샤넬은 실제로 몇 달 동안 저희 작업을 지켜봤어요. ‘이 색은 기계로는 못 만들어낸다’고요. 샤넬 상하이 컬렉션에 특별 초청돼 패션쇼 참여제품 40벌 전체를 우리 천연염색 원단으로 제작해 단독 패션쇼로 개최했죠” 밤낮으로 작업에 매진한 결과는 놀라웠다. ‘세계 50개국 샤넬 매장 메인 오더(신상품) 50벌’과 수출제품 추가 오더까지 받았고(천연 염색 원단 8000 미터 납품)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 국제 섬유수출 로드쇼에 샤넬이 초청해 수출계약을 체결할 정도로 우리의 홍염 천연염색 기술을 세계가 인정하고 극찬한 것이다. 홍염 원단은 세계 패션계에서 ‘한국이 가진 가장 신비한 천연색’이라 평가받기에 이른다.   홍염은 더 이상 한 장인의 집안에서만 전승하는 개인적 기술이 아니라, 국가가 지켜야 할 문화자산임이 이미 세계를 통해 입증된 사례였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이 기술은 ‘비지정 상태’로 남아 있다. 천연염색 매염재료를 직접 채취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고 36회 반복 염착을 감당하려는 젊은 후계자는 거의 없다. 화학염료가 보급되며 천연염색은 ‘느리고 비효율적인 기술’로 밀려났다. 그렇기에 지금 추진되는 ‘미래 무형유산 발굴·육성’ 사업은 결정적 기회다.   그가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는 전통 홍염을 비롯한 천연염색 기법이 문화재로 인정받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화의 길을 여는 일이다.    “신라 염궁이라는 관청이 분명히 존재했고 천연 다색 염색을 구현하는 저희가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색 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저희 가족은 쪽의 남색, 자초의 보라색, 검정 등 다양한 다색 염색을 모두 실현합니다. 이런 천연 다색 기술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방문객들도 반색하고 있어요”   염색 재배부터 생산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 체험’ 역시 그의 자부심이다. 직접 염액을 만들고 자연 재료로 만든 매염제를 써보는 과정까지 한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술과 체험을 확장해 경주에 ‘신라 왕실 복식·색 문화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라 복식뿐 아니라 조선 궁중 의상, 현대 한복까지 입어보고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경주만의 색과 디자인을 담은 상품을 만들어 가져갈 수 있다면 관광 효과는 훨씬 커질 것입니다” APEC 경주 개최는 그의 꿈에 더욱 확신을 더했다. “경주가 세계 무대에 더욱 알려진 이번 APEC을 계기로 우리 천연염색이 더욱 발전하고 후세대에 올바르게 계승되길 바랍니다”   박순라 홍염장은 인터뷰 말미에 “국가유산청의 미래 무형유산 발굴육성사업 신청을 계기로 좀 더 체계적이고 고증된 방식의 홍염 천염염색 전통기술이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발굴육성된다면, 전통 홍염기술과 천연염색 홍염원단의 우수성이 세계를 무대로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큰 비단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며 “홍염 천연염색 기술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된다면 힘들고 어려운 천연염색과정과 복잡한 기술일지라도 그 맥을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늘도 경주의 염색 공방에서는 천연에서 빚어지는 색들이 세상과 조우하고 있다. 이제 그 빛깔들이 국가의 미래유산으로 자리잡을 차례다.   박순라 홍염장은 천연염색 복식 분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오며 신라문화제·세계문화엑스포 등 국내외 주요 행사에서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을 결합한 의상을 선보여왔다.   1988년 신라문화제 원화선발대회와 울산한복미인대회 출전자 의상 제작, 2006년 KBS 대구총국 ‘천년의 빛깔, 그리고 대나무전’, 2007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특별기획전 ‘천년의 빛, 그 신비한 빛깔 속으로’ 등에 천연염색 복식 제작과 소품 등을 출품했다. 특히 2007년 세계문화엑스포 특별관에서의 60일간 전시는 전국 관광객이 거의 이 전시를 관람할 정도로 인기를 끌어 감명 깊었던 전시라고 손꼽았다.    또 2007~2009년 경주 술과 떡 잔치, 2008 내나라여행박람회 신라명품 천연염색전, 2008~2009 대구국제섬유박람회 특별무대에 연이어 참여했으며 2009 미스경북·미스코리아 대회 및 2010 방콕 미인대회 참가자 의상 제작, 신라왕들의축제 , '2025APEC 흥해라 신라난전' 등도 맡아 여러 다양한 국내외 대회와 행사에 참여했다. 경주·경북 관광기념품전, 대한민국미술대상전, 한국전통산업진흥협회전, 부산미술대전, 부산텍스타일디자인대전 등에서 우수상·특별상·동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전문성까지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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