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는 한국사에서 ‘의병의 도시’라 불릴 만큼 국가적 위기 때마다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지켜온 역사적 전통을 지닌 지역이다. 조선시대 외세의 침략이 있었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국권 침탈 시기, 영천에서는 두 차례의 대표적인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던 성을 의병이 중심이 되어 탈환한 영천성 수복대첩,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조직된 대규모 의병부대 ‘산남의진 항일투쟁’이 그것이다.이 두 사건은 약 300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지만 공통점이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중앙의 군대가 아니라 지역 유림과 주민들이 스스로 결집해 나라를 지키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영천을 오늘날까지 ‘호국의 도시’로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영천성 수복대첩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뒤 경상도 일대를 빠르게 장악하며 북상했다. 당시 영천은 경주와 대구, 안동을 연결하는 교통과 군사 전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급속한 진격 속에서 영천 역시 1592년 4월 22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영천성을 지키던 군수 김윤국은 충분한 방어를 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물러났고, 일본군은 약 1천 명의 병력을 남겨 영천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일본군은 주변 마을을 대상으로 약탈과 방화, 살육을 자행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영천 지역의 유학자와 주민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의병을 일으켰다.유학자 정세아, 정대임, 무인 권응수 등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됐으며 신녕·경주·하양·의성·영일 등 인근 지역의 의병과 관군이 합류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약 3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좌·우·중의 세 부대로 편성하고 군대 이름을 ‘창의정용군’이라 정했다.의병들은 곧바로 영천성 탈환을 목표로 작전에 돌입했다. 먼저 성 주변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고립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창암 전투, 박연 전투, 겁림원 전투 등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군의 활동을 제한했고, 결국 영천성을 포위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마련했다.1592년 7월 23일 의병들은 영천읍성 남쪽 추평(현재 주남들)에 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7월 26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의병들은 영천 지역의 계절풍인 ‘건들매’ 바람을 활용한 화공 작전을 펼쳤다. 동문과 남문에서는 주력부대가 공격을 펼쳤고, 권응수 등이 이끄는 부대는 서문과 북문을 동시에 압박하며 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7월 27일 의병들은 성 안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영천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이 전투에서 의병은 전사 83명, 부상 238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또한 말 200필과 총·창 등 900여 점의 무기를 노획했고 일본군에게 붙잡혀 있던 조선인 포로 1천여 명을 구출했다.영천성 수복은 임진왜란 최초의 대규모 육지전이며,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과 의병이 거둔 중요한 승리였다. 이 승리로 경주와 안동을 연결하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영남 지역 일본군의 전략에도 큰 차질이 발생했다.조선왕조실록인 선조실록에서도 영천성 수복 소식을 자세히 기록하며 큰 승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문신 이항복은 문집 백사집에서 이 전투를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승전 가운데 하나로 언급했다.영천시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2018년 조례로 ‘임란 영천성 수복대첩 기념일’을 지정하고 매년 9월 2일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 산남의진의 투쟁 영천의 의병 전통은 임진왜란에서 끝나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영천에서도 또 한 번 대규모 의병 부대가 조직됐는데, 그것이 바로 산남의진이다.산남의진은 대한제국 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와 함께 조직한 항일 의병 부대였다. 1906년 3월 영천에서 창의한 산남의진은 영천·포항·청송·의성·군위 등 경상북도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당시 의병 규모는 약 1천 명에 이르러 영남 지역에서 가장 큰 의병부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이 부대에는 농민뿐 아니라 포수, 광부, 노동자, 전직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이는 당시 의병 운동이 단순한 지역 방어를 넘어 민중 전체가 참여한 항일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산남의진은 영남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관동 지방으로 북상해 다른 의병과 연합하고, 궁극적으로 서울로 진격해 일본 세력을 몰아낸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구상은 이후 전국 의병이 연합해 추진한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의 선구적 시도로 평가된다.산남의진의 활동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1906년 제1차 의진은 영천과 청하, 강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의병장 정용기가 일본군의 계략에 의해 체포되면서 부대는 일시적으로 해산했다.1907년 정용기가 석방된 뒤 제2차 의진이 재편됐다. 이 시기 의병들은 포항 점령과 영천 공격 등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영일군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정용기와 주요 장령들이 전사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이 의병장을 맡아 제3차 의진을 조직했다. 의병들은 보현산과 북동대산을 거점으로 청하·흥해·영덕 등지에서 일본 경찰기관을 공격하며 항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속에서 정환직 역시 체포되어 1907년 총살로 순국했다.1908년에는 최세윤이 제4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다시 의진을 재편했다. 그는 영남 지역을 여러 지대로 나누어 지구전을 펼치는 전략을 채택했고, 의병들은 보현산과 주왕산 일대를 중심으로 산악 유격전을 전개했다.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토벌 작전과 군수 물자의 부족 속에서 의병 세력은 점차 약화됐다. 결국 1910년 청송 고와실에서 일본군 합동 토벌대에 의해 많은 의병이 체포되거나 희생되면서 산남의진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산남의진을 이끈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천 자양면에는 충효재가 세워져 있다. 1923년 건립된 이곳에는 두 의병장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지역민들이 항일 정신을 기리는 역사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수복대첩과 대한제국 말기의 산남의진 항일투쟁은 서로 다른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영천이 국가 위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다.중앙의 군대가 무너졌을 때 지역 사회가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경험은 영천 지역 공동체의 중요한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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