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되면 해마다 기념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76주년이다. 대한민국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아픈 역사가 있다. 6·25 전쟁은 중국과 소련 양국의 흉도와 사주 밑에 북괴의 기습침략으로 발발된 민족공통의 참화이며 수난이었다.  고요한 평화의 나라 대한민국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조선인민군에 의해 한밤중에 기습공격을 받아 초토화됐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노골적인 침략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으로부터 협조와 지지를 얻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인민군 '폭풍 224'라는 암호명으로 38도선 이남 대한민국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밀고 밀리는 전쟁은 많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희생됐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까지 3년 1개월 3일(1129일)간 이어진 이 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된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정전 이후 73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북한의 핵 개발 등의 영향으로 한반도 남북 간 왕래 불가와 적대적 대치 상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어 우리가 바라는 종전 협정은 요원한 상황이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는데 전후 냉전의 시작을 대표하는 사건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동시에 대한민국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대한민국과 16개국 국가들이 함께 뭉친 17개국의 UN 연합군과 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을 중심으로 뭉친 공산군 사이의 벌어진 국제전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현재의 군사분계선 근방을 두고 지속적인 소모전이 이어졌다. 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 포로 송환 등 여러 가지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여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6·25 전쟁 지속에 반대하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반도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정부가 대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학도병과 영웅들의 희생한 한국 동란이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영웅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상이군경과 유족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상 이 전쟁 결과로 남북이 아직도 갈라져 있는 상태이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연속된 한국의 암흑기를 연 사건인 이 전쟁은 오늘날까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와 상호 간 대치는 언제 풀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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