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묘봉리 산124-1번지에 가면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이었던 임정(林整: 1356~1413)의 묘가 있다. 그는 고려말 향리로 입신하여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을 거쳐 1393년(태조 2)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태종 1년(1401)에는 전라도·충청도의 조운체찰사(漕運體察使)가 되어 쌀과 콩 10만2천여 석을 운반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경상·전라·충청도 체찰사 겸 수군도절제사 조운염철사(漕運鹽鐵使)가 되어 3도의 주민을 동원하여 배(造船)를 건조하였는데, 경상도에서 111척, 전라도에서 80척, 충청도에서 60척을 각각 만들었다. 
 
이어 1403년 동북면 도순문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고, 이듬해 중군도총제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형조판서를 거쳐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영흥부윤이 되었고, 1410년에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되었으나 평양부에서 종기가 나 4일 만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며 사람됨이 순하고 조심스러우며 후하였다. 가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있어서 아전과 백성들이 기뻐하며 따랐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성종조에 청백리에 뽑혔고 1482년(성종 13) 왕이 하사한 산 40여 리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평택임씨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문중으로 신라시대인 서기 870년경 당나라 8학자의 한 사람인 임팔급(林八及)이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정착하면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계보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고려 말부터 시작하고 있다. 
 
평택임씨는 크게 전객령공파와 충정공파 두 계통으로 이어오고 있는데 임정은 전객령공파 4세로 임세춘의 증손이다. 아버지 임태순은 평양부윤, 할아버지 임재는 예조판서와 대재학을 지냈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임인산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 차남 임명산은 이조판서, 삼남 임갑산도 좌승지를 역임했다. 이후 손자들도 번창하였는데 그의 8대손이 조선 후기의 명장 임경업(1594~1646) 장군이다.
이곳의 산세는 한남정맥인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수봉(403.2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온 지맥이 이동읍 묘봉리 시궁산(514m) 지맥에 이르고, 여기서 분맥을 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자락이 갈미봉(332.2m)을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본 묘소는 갈미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다. 혈장 뒤편의 현무봉은 금형체이고 묘소 앞쪽의 안산은 백호 자락이 길게 뻗어 나와 멋진 토성체의 일자문성으로 혈장에 좋은 기운을 보내주지만 약간 비주하는 형상이라 아쉽다. 
 
이곳의 수세는 좌선룡에 우선수로 합법하고 우측 백호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혈장 앞을 지나 이동저수지로 흘러든다. 일부에서는 이곳 산세의 형국을 늙은 쥐가 곡식을 먹으러 들판으로 내려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앞에서 보면 영락없이 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뒤쪽의 현무봉은 몸통이고 옆에는 앞발과 뒷발, 꼬리 부분까지 다 갖추고 있는데 묘는 쥐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다고 말한다. 풍수에서는 이 형국이 쥐의 본성처럼 후손이 번성한다고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