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벙개 한 번 칩시다”‘벙개’. 참 정겨운 말이다. 번개처럼 갑작스럽게 만나자는 뜻에서 생겨난 이 말은 1990년대 PC통신 시절 온라인 동호회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얼굴도 모르던 사람들이 ‘오늘 저녁 번개?’라는 짧은 글 하나에 모여 친구가 되었고 어느새 ‘벙개’라는 은어로 온라인을 넘어 우리의 일상 속 언어가 됐다. 지금도 ‘벙개 치자’는 말에는 거창한 약속도, 형식도 없다. 그저 시간이 허락하면 얼굴 한번 보자는 따뜻한 초대가 담겨 있다.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은 계획보다 즉흥에 더 많이 움직인다. 한 달 전 달력에 적어둔 약속보다 “지금 나올 수 있어?”라는 한마디에 더 설레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며칠 전 기자도 그런 벙개 하나에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한 모임의 구성원으로부터 저녁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참석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문화유산 발굴기관을 이끌고 있는 구성원과 문화유산 전문사진가, 그리고 발굴기관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구성원이 함께 나온다는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의 ‘최애’ 3인방이 모여 있다니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매월 정기적인 문화유산 답사를 통해 만나왔지만 바로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편안하다. 오래 알고 지낸 시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신뢰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불판 위에서는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우리들의 이야기 또한 그 소리만큼이나 맛있게 익어갔다. 누군가는 현장의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문화유산 이야기를 꺼냈으며, 기자는 취재 현장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보탰다. 웃음소리가 몇 번이고 식당 안을 메웠다.그러다 사진가인 지인이 조용히 말했다. “요즘 좀 외롭네요” 늘 카메라를 메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현장을 누비던 이의 입에서 나온 토로였다. 최근 작품 활동도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우리는 특별한 처방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술잔도 함께 기울였다. 누군가의 고민은 어설픈 정답보다 공감이 먼저라는 사실을 새삼 배우는 시간이었다.문득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세상 걱정도 하고 물가를 걱정하고 정치도 이야기하고 사는 게 팍팍하다고 한숨도 쉬지만 결국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간다.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중년을 지나며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도 안줏감이 되었고 지나온 세월도 술안주가 되었다.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니 누군가 말했다. “맥주 한 잔만 더 할까요?” ‘2차’ 제안이었다. 만석인 호프집이라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이야기의 결은 조금씩 깊어졌고 농담 사이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격려가 숨어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반가웠고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았기에 더 돈독해졌다는 사실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약간의 숙취는 남았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2500여 년 전에 이미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이야기했다. 오늘날처럼 휴대전화도, 메신저도 없던 시대에도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행복했다.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닐까.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 약속은 미루고 안부는 문자로 대신하고 얼굴 한번 보는 일이 쉽지 않다. 하루에도 수십 명과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정작 마음을 터놓고 웃을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시대다. 그래서 벙개가 필요하다. 거창한 모임이 아니어도 좋다. 퇴근길 밥 한 그릇도 좋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도 좋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별말 없이 웃는 시간이어도 충분하다. 우리는 결국 사람에게 위로받기에.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별것 아닌 농담에 함께 웃어주고 “괜찮다”는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벙개는 갑자기 마음을 확인하는 약속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하는 일마다 꼬여 한숨만 쉬는 친구나 지인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휴대전화를 한번 들어보자. “오늘 시간 되면 벙개 한번 칩시다”어쩌면 그 제안은 지친 하루를 구하고 오래된 우정을 다시 살려내며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등불 하나를 켜줄지도 모른다. 다시, 훈훈한 벙개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