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은 삼국유사에 두편의 글을 올린 인물이다. 무극으로 기명된 글은 전후소장사리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다. 때문에 저자인 일연과 함께 편저자로 거론될만큼 유사의 편찬과 연관된 인물인데다 일연의 제자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일연과 무극을 동일인으로 보기도 했다. 이는 무극의 존재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각종 국가자료도 명확하지 않다.
무극은 말년의 호로 알려지면서 검색어도 혼구(1250-1322)를 쳐야 나온다. 자는 구을이며 속명 혹은 초명이 청분이라 하나 자호 일 수도 있다 10세에 무위사로 출가해 천경선사의 제자가 되어 승과에 합격했으며 중장년에 들어 청분으로 활동했다.
또 같은 시기 산립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말년에는 몽산덕이의 무극설을 터득하고 호를 무극으로 했다. 혹자는 무극을 도교와 연관짓고 있으나 이는 몽산덕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몽산덕이는 무자화두로 간화선에 심취했고 혼구 만항 이승휴등과 교류하며 고려에 육조단경을 유통시킨 원나라의 선승이다. 혼구는 일연의 행장을 쓰면서 청분이라 했고 비문에도 청분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일연의 인각사비에는 1295년 민지가 비문을 짓고 죽허가 왕희지체로 집자를 하고 문인 내원당 겸 주지 통오진정대선사 청분이 비석을 세웠다고 했다.
또 비석의 음기를 산립이 지었는데 산립 역시 혼구의 또다른 이름이다. 비석의 음기에는 일연을 기리는 대선사 17명의 명단을 열거하면서 정작 자신은 인각사 청분으로 이름을 올렸다.
일연이 입적한 1289년에는 운문사 주지로 있었고 이후 연곡사 보경사 등지에서 주지로 활동했다. 1313년 왕사로 추대되고 1322년 입적후 보감국사로 추증되고 탑명을 묘응이라 했다.
혼구는 청분 산립 무극으로 자호를 시대별로 사용한 것이다. 오늘날 무극을 두고 여과없이 일연의 제자라고 한다. 일연의 행장을 짓고 비석을 세우고 비석의 음기를 짓고 운문사와 인각사의 주지 등 일연의 지근에서 보필한 인물이기에 당연히 제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산립이라는 이름으로 일연의 비석에 음기를 지으면서 '국존생전에 인연이 없어 문도의 대열에 서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했다.
다행히 비석의 음기를 짓게 됨에 '내세에서라도 스승으로 모실 인연이 맺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무극 스스로 제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일연의 제자든 아니든 뭐가 문제냐고 할지 몰라도 역사는 사실과 허구의 구별을 통해 상징을 유추해야 한다.
기본을 모르고 잘못된 논리에 따라 상징을 수용한다면 사고의 틀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된다. 사실을 간과하면 역사해석에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당나라 문인 유지기는 '역사를 해석하기 이전에 사실에 대한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사료비판과 교차검증을 통해 사람과 사실을 이치적으로 판단하면 역사의 위증을 구별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의 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삼국유사의 초간본 존재를 일연 생전에서 벗어나 무극이 입적한 1322년까지 확대시켜 보려 하고 있으나 설득력을 잃고 있다.
첫째는 유사가 일연의 수많은 저술목록에서 빠져 있듯이 무극도 유사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자신의 비문에서조차 유사의 편찬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유사의 왕력이 1310년 이후 작성된 것이고 유사의 내용도 1281년에서 일연 사후인 1310년으로 거슬러 오르지만 편찬시기의 비정은 여전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유탁일은 일연이 분권없이 절첩의 형식으로 만든 원고본을 무극이 자기의 글을 보입하여 일차 간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초간본은 없고 선초본과 임신본만이 남아 있어 설에 그치고 있다.
무극이 진정 일연의 제자라면 스승의 지근에서 자료수집과 정리에 이어 집필의도를 간파했을테고 사후에라도 유작을 반듯하게 완성시켜 놓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