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1688~1724)은 조선 제20대 왕으로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들이다.    숙종은 오래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원자에 책봉했고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라 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원자 책봉에 반대하였으나 숙종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가 1690년(숙종 16) 세자에 책봉된 뒤 인현왕후의 폐위로 공석이 되었던 왕비 자리는 세자의 생모인 장씨가 차지하게 되었으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몰락하면서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경종을 흔히 비운의 왕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삶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이라 여겨져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 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았고, 세자책봉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사사되는 등 정치적 갈등도 격화되었다.    1720년 6월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였던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재위 기간은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당쟁의 절정기로 국정은 크게 흔들렸다. 그 와중에 경종은 재위 4년 만인 1724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경종은 어린 시절 총명하고 학문에도 밝았다고 전해지지만, 생모 장희빈의 비극적인 죽음과 세자 시절부터 이어진 정치적 압박 속에서 평생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는 두 명의 왕비를 두었으나 병약한 탓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다.    특히 임종 직전 세제였던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심한 복통과 설사를 겪었다는 기록 때문에 독살설이 나돌기도 하였다. 결국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었고 그는 훗날 영조로 즉위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 이후에도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에 시달렸으며, 이러한 정치적 긴장은 훗날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비극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인 도봉구 도봉산(638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836.5m)을 일으키고, 여기서 남쪽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와 성북구 석관동에서 천장산(140m)을 일으켜 의릉의 주산이 되었다.    이곳의 혈장은 금형산 아래에 맺힌 유혈의 형세로 위쪽에는 경종의 능이 자리하고 뒤편에 곡장을 둘렀으며 그 아래에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묘소 뒤 천장산(天藏山)은 ‘하늘이 숨겨둔 곳’이란 뜻으로 과거부터 보석 같은 땅으로 전해져왔다.    그러나 현재의 풍수 입지 평가는 이곳이 큰 명당이라기보다는 주변의 사신사 등 다소 흠결이 있는 장소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경종은 사후 왕릉지 선택에 있어서도 원래 서대문구 안산(鞍山) 근처가 후보지였으나 풍수상 흉하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신들과 풍수 지관들 사이에서도 의릉의 풍수 입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고, 심지어 밤이면 능 주변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들린다거나 관리들이 이상한 꿈을 꾸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암시하기도 한다면서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은 여러 의혹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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