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화랑제도를 진흥왕대로 보지만 사다함의 활약으로 보면 진흥 이전에 화랑제도가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화랑의 가치가 격하되는 것은 토사구팽의 고사처럼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효소왕때 죽지랑 조의 얘기는 화랑의 위상격하를 상징하고 있다. 죽지랑조에는 득오가 죽지랑의 낭도로 있다가 모량부의 아간 익선에 의해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차출된다. 이때 화랑 죽지랑이 부역중인 득오를 찾아가 익선에게 휴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는 이야기다.
일연은 효소왕때의 일화라고 서술하면서 화랑의 쇠퇴를 상징하려 했지만 시대의 설정이나 내용상으로 모순을 범하고 있다.
첫째는 죽지랑의 출생과 활동시기가 불명확하다는 점이요. 둘째는 득오를 방문한 시기의 문제요. 셋째는 재상까지 지낸 인물이 화랑의 신분으로 낭도를 위문방문했다는 점이며. 네번째는 진골의 신분인 죽지랑이 일개 아간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점이다.
먼저 죽지랑의 출생시기를 부친인 술종공이 삭주도독으로 부임한 이후로 보면 언제 삭주도독으로 부임했는가에 따라 출생이 귀결된다.
술종공은 진평왕대에 활동한 인물로 유신공과 함께 국사를 논하며 진덕5년 651년에 중시가 된다.
아들 죽지랑은 진덕 무열 문무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유신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부사령관이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무열 문무 신문왕 등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효소왕때 화랑이 되어 낭도의 근무지인 부산성을 방문해 관직 6등급인 아간 익선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득오의 부역은 진평왕때의 일을 일연이 효소왕때의 일화로 서술했다는 일각의 해석도 내용상 모순이다.
부산성은 문무왕 3년인 663년에 쌓은 성인데 진평왕때의 일화로 보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진평왕때라면 삼한통일 과정이므로 화랑의 위상약화로 연결지을 수 는 없는 것이다.
또 국선 화랑 낭도로 이어지는 화랑의 체계상 화랑은 진골이상의 귀족이 맡는다.
화랑으로 진골인 죽지랑과 아간 벼슬아치와는 격이 다르다. 효소왕대의 죽지랑조가 주목받는 것은 시기와 내용상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죽지랑의 부하사랑에 대해 죽지랑을 추모하는 득오가 향가로 지은 모죽지랑가란 작품 때문이다.
사실 화랑의 위상실추는 백률사조에 언급된 부례랑의 납치사건이 적절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일연은 백률사조에서 화랑의 최고 수장인 국선 부례랑이 효소왕 693년에 말갈의 이민족에게 납치되고 궁중 보물창고인 천존고에 보관중이던 가야금과 만파식적이 없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불교와 재래신앙의 습화를 통해 불교사상의 승화를 의도한 것이지만 화랑의 쇠퇴를 가늠할 수 있다.
더구나 국선 부례랑을 따르는 낭도가 1천명이 되는데도 수장이 납치될때 수장을 구하러 간 이는 안상 한명뿐이라는 사실에서 문무 신문왕을 거처 효소왕때 이미 화랑의 기강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은 신문왕의 맏아들로 6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20대 초반에 석연찮게 죽는다.
이는 죽지랑조에 언급된 모량리 출신의 관리등용 배제와 승려제한 등 모량리 출신에 대한 연좌죄를 감안하면 효소왕때 정치적인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재임 10년간 각종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변고를 당해 동생인 성덕이 왕위를 물려받은 사실에서 재임 10년간은 통일신라 출범후 정치적으로 첫번째 위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통일이후 잠시 위기가 왔지만 성덕으로 이어지면서 사실 통일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한편 삼국통일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화랑은 효소왕대에 이르러 위상이 실추되고 존재감이 상실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