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가면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이었던 효장세자(1719~1728)의 무덤인 영릉(永陵)이 있다. 효장세자는 숙종 45년(1719)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영조의 장남으로 성장하였고,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해(1725)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는 효장세자에게 각별한 기대와 애정을 쏟았으며 조정 역시 그의 존재를 왕조 안정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러나 효장세자는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약해졌고, 안타깝게도 1728년 겨우 열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영조에게 큰 슬픔과 상실감을 안겼으며, 왕실의 후계 구도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그는 사후에 ‘효장(孝章)’이라는 시호를 받고, 경기도 파주 조리읍에 능을 조성하였으며 이를 영릉이라 하였다. 영조는 효장세자 사후 8년 뒤인 1735년에야 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효장세자가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영조는 왕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이산을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써 이산은 훗날 효장세자의 아들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정조는 즉위하면서 그의 양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1908년 대한제국 때는 황제로 추존되어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가 되었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로 역사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의 존재는 조선 후기 왕통의 흐름과 왕위계승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효장세자는 사후 한성부 연희궁 근처 북아현에 매장되었다가 1729년(영조 5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부인 효순 왕후(1715~1751)와 함께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이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1776년 영릉(永陵)이란 능호를 받고 왕릉으로 격상되었으며 공릉(장순왕후), 순릉(공혜왕후)과 함께 파주삼릉 가운데 한 곳이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한강봉(474.8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간 지맥이 파주시 광탄면에서 계명산(559.9m)을 지나 고양시 덕양구에서 우암산(328.5m)을 일으킨다. 파주삼릉은 우암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뻗어 나가 광탄면 용미리에서 명보산(245.3m)을 일으켜 영릉(永陵)의 주산이 되었다.    영릉은 유혈의 혈장에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서향이고 좌우 청룡·백호와 안산은 나름 양호한 편이나 배산과의 거리가 있어 뒤쪽이 좀 허(虛)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능역 뒤쪽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고 곡장을 둘러 바람의 피해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리고 전순 아래에는 혈장의 기운을 받쳐주는 요석(官星)이 박혀있어 이곳이 진혈 처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풍수에서는 혈장 아래에 돌이 박혀있으면 이를 관성(官星)이라 하고 진혈의 증거로 삼는다. 또한 이곳의 수세는 혈장의 우측으로는 공능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능역 우측을 환포하면서 흘러 좌측에서 흘러나오는 공릉천에 합수한 후 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파주삼릉은 약간의 거리감은 있으나 3면이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어 능역 안쪽의 생기를 잘 갈무리해주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