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과 붓, 대나무라는 익숙한 서화의 언어는 오늘의 감각과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야정(野丁) 서근섭 작가의 70여 년 필묵을 통해 이 질문을 풀어보는 전시가 열린다.시안미술관은 오는 11월 15일까지 전관에서 하반기 특별기획전 '취향(取向) — 이어 변주하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서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해온 서근섭 작가의 작업을 통해 ‘전통의 계승과 변주’를 살펴보는 자리다.전시 제목의 ‘취향(取向)’은 흔히 쓰는 ‘취향(趣向)’과 한자가 다르다. 가질 취(取)와 향할 향(向)을 써 ‘무엇을 취해 어디로 향하는가’를 뜻한다. 여기에 ‘이어 변주하다’라는 부제를 붙여 전통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취해 오늘의 언어로 다시 풀어내는 작가의 태도를 담았다. 전시는 ‘취묵(醉墨) — 형(形)을 벗다’, ‘희필(戲筆) — 격(格)을 풀다’, ‘유희(遊戲) — 색(色)을 취하다’ 등 세 구역으로 구성된다.첫 번째 ‘취묵’에서는 대나무의 구체적인 형상이 점차 사라지고 먹의 획과 기운이 화면을 이끄는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대나무를 그리되 대나무의 외형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전통적인 사군자 회화가 지닌 형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희필’에서는 그림을 거는 방식부터 달라진다. 벽에 세워 감상하는 일반적인 회화와 달리 작품을 바닥에 눕혀 관객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도록 했다. 이는 종이를 바닥에 펼쳐놓고 작업해온 작가의 자세를 관객과 공유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감상법과 전시 형식을 비틀어 회화와 관객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세 번째 ‘유희’에서는 색채가 등장한다. 먹으로 표현해온 대나무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고, 푸른색이나 불그스레한 색을 화면에 들인다. 전통적인 수묵의 질서에서 벗어나면서도 대나무라는 소재를 통해 기존의 작업 세계와 연결한다.이처럼 이번 전시는 형식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전통의 본질을 되묻는다. 전통적인 대나무의 형상을 지우고, 회화의 전시 방식을 바꾸고, 먹이라는 재료에서 벗어나는 실험은 전통과의 단절이라기보다 전통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내는 과정에 가깝다.변숙희 시안미술관장은 “지금 전통이라 부르는 것들도 처음에는 당대의 새로움이었다”며 “이번 전시는 전통을 무너뜨리는 장면이 아니라 전통이 만들어지던 순간을 다시 보는 자리”라고 밝혔다. 서근섭 작가는 대구 서화의 전통을 이어온 원로 서화가다. 석재 서병오와 죽농 서동균으로 이어지는 대구 서화의 맥을 잇고 있으며, 1991년 계명대학교 서예과 신설을 주도했다. 현재 사단법인 죽농서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명예서화심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75년부터 개인전을 이어온 작가는 대구와 서울, 부산은 물론 프랑스 그르노블과 스트라스부르 등 국내외에서 작품을 선보여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수묵의 향기, 수묵의 조형전'과 '한·중·일 현대 수묵화 초대전'을 비롯해 중국·일본 등 국제 서화 교류전에도 참여했다.70여 년 동안 붓과 먹을 다뤄온 작가의 이번 작업은 전통 서화의 형식을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익숙한 대나무를 통해 형과 격, 재료의 경계를 차례로 풀어내며 전통이 오늘의 미감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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