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내게는 등려군(鄧麗君, 1953~1995)을 좋아하던 중문과 친구(老朋友)가 있었다. 그해 여름 그 친구가 책을 한 권 읽어보라며 건네줬는데, 제목은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 1937)’ 이었다. 책은 두툼해서 한동안 못보다가 이후에서야 읽어 봤는데, 1936년 10월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소노우(Edga Snow, 1905~1972)’가 마오쩌둥을 대담하며 고난을 기술하여 알린 유명한 책이었다. 지금도 그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표지를 넘기면 ‘1988年 8月 30日 학교서점에서 (중국어 report)’ 라고 쓴 정겨운 친구의 글씨가 있다.중국의 국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혁명을 통해 주석에 오른 지 27년 되던, 1976년 9월 9일 서거해서 올해 50주년이 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초대 주석이 된 마오는 이때 천안문에 사진이 걸린 이후, 지금까지 주석은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사진은 그날 이후 줄곧 걸려 있다. 미국 달러에는 여러 위인이 있지만 중국의 위안화에는 각 지폐에 색상이 다를 뿐 마오가 등장한다. 마오는 신이 된 것이다.1927년 8월 난창(南昌) 무장봉기 이후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공산당 탄압에 몰두한다. 홍군은 국민당에 쫓겨 368일에 걸쳐 18개의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km에 달하는 장정(長征, 1934. 10. 16~1935. 10. 18)을 거친다. 장갑차와 비행기를 보유하고 중국을 차지한 국민당과 오지의 농민들로 구성된 공산당의 홍군은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장정에서 홍군은 약탈을 금하는 등의 기율로 농민의 민심을 얻어, 무기와 자금이 앞서지만 부패한 국민당을 이긴다. 1935년 12월 쭌이(遵義) 회의에서 마오가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선출되는데, 그가 주장한 것이 치고 빠지는 전술인 유격전이다. 이날 지도부 회의에서 간부들이 “손자병법’이나 보는 마오가 뭘 안다고 지휘를 맡기냐?’고 하자 마오는 ‘동지, 손자병법이 몇 장으로 된지는 아시오?’라고 물으며 이후 연승으로 국민당 군을 괴롭힌다. 이후 산시성 북쪽의 혁명 도시 옌안(延安)을 수도로 삼는다. 1949년 마오는 중국을 건국하고 장제스는 패배해 대만으로 도주한다. 마오는 네 번 결혼 한다. 첫 결혼은 당시 풍습대로 열네 살에 부모가 맺어준 먼 친척이었다. 이후 첫 마음을 준 상대는 창사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스승인 양창지(楊昌濟)의 딸 카이후이(楊開慧, 1901~30)와 맺어진다. 1930년 10월 그녀는 창사에서 국민당군에 체포 되는데, 마오와 이혼하고 공개로 비난하면 살려준다고 해도 끝내 처형당한다. 후에 그 마을은 카이후이로 개명하고 동상을 세운다.세 번째는 징강산(井岡山)에서 현지 통역이던 혁명 소녀 허쯔전(賀子珍, 1909~84)을 만나 결혼한다. 그녀는 국민당의 폭격으로 파편이 머리와 몸에 박혀 정신병에 시달린다. 치료 명목으로 모스크바로 보내져서 47년 귀국하나, 숨어 살아야 했다. 장정 시 그녀는 명사수였다고 한다.네 번째 여인이 장칭(江靑, 1914~1991)인데, 연극 배우 출신으로 옌안에서 마오와 결혼한다. 문화대혁명 때 4인방의 수장으로 광기의 숙청을 주도했다. 마오가 죽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1년 수감 중 자살한다. 그녀는 기질이 대단하여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고 재판 중에도 눈을 치켜세우며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냐?’며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마오의 장남은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 母 양카이후이)인데, 러시아에 유학해서 러시아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그는 한국전이 발발하자 지원병으로 참전하게 된다. 당시 중-조연합군 총사령관이던 핑더화이(彭德懷, 1898~1974)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통역으로만 있으라는 조건으로 허락하나, 11월 24일 미군 폭격으로 사망하고 만다. 현장은 처참해서 시신은 못찾고 스탈린에게 선물 받은 권총만 발견되었다. 사건을 보고하자 마오는 처연했다고 한다.패왕별희(覇王別姬, 감독 천카이거, 1993)는 경극 패왕 항우(장풍의)와 연인 우희(장국영)가 사면초가로 패해, 우희의 자결로 이별을 담은 영화이다. 영화는 경극을 소재로 하여 문화대혁명 때 마오 어록을 손에 들고 광장에 모인 홍위병 군중이 ‘타도‘를 목에 건 지식인을 매도하는 집단적 광기를 담고 있다. 실제 감독은 소년시절 단상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비판하고 그날의 아픔을 영화에 담았다고 한다.마오는 주석직을 화궈펑(華國鋒)에게 물려준다. 그는 ‘마오쩌둥의 모든 것은 옳았다(凡是論)’며 마오를 계승하려고 했고 당의 실권자 덩샤오핑은 마오를 단절려는 격렬한 갈등을 겪는다. 인민은 이미 새로운 마오의 시대를 요구했다. 주석이자 덩의 측근인 후야오방(胡耀邦)이 서거하자(1989. 4. 15),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태(1989. 6. 4)가 발생한다. 그후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흑묘백묘론’ 개혁개방 정책으로 오늘날 중국은 세계 경제 강국이 된다.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대혁명(1966~1976)으로 수천만 명의 인민이 희생된다. 같은 고향(후난 사오산湖南 韶山)인 류사오치(劉少奇, 1898~69)와 핑더화이를 비롯한 장정을 함께한 허룽(賀龍), 주더(朱德) 등 동지들을 숙청했다. 마오는 말했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장정 때부터 퇴각 시에는 항상 후방에 남기고 두 차례나 숙청당한 덩샤오핑은 마오를 평하길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했다. 건국에는 공이 컸지만 통치에는 적지 않은 과오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6년 1월 8일, 2인자이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는 암으로 먼저 사망한다. 그는 더 이상 ‘마오 주석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지 못했다. 중국이 현대 사회로 넘어올 수 있도록 이끈 마오쩌둥. 그를 시작으로 중국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한다. 2012년 11월부터 주석직을 승계, 2022년 10월 첫 3연임 중인 시진핑은 마오의 시대를 꿈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