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집(畫集)을 들여다보다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그림 ‘절규’에 눈길이 머물러 새삼 전율을 느꼈다. 오래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그때보다 훨씬 강렬한 공포감을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핏빛 하늘, 유령이 튀어나올 듯한 배경, 동그랗게 뜬 눈과 홀쭉한 뺨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 듯한 분위기… 19세기 말 상징주의의 결정판으로 20세기 표현주의 화풍에 획기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이 그림에 대해서는 ‘현대인의 정신적 고뇌’, ‘생의 공포’, ‘인간 내면의 절망적 심리상태’라는 다양한 평가가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패러디되고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런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불현듯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소설 '구토'에서 물가의 돌을 줍다가 느닷없이 구토감을 느끼는 주인공도 겹쳐 떠올랐다. 장르가 다른 그림과 소설인 이 두 작품은 현실 세계의 갑작스러운 무너짐과 자신의 존재를 이물질처럼 느끼는 공황장애의 심리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일상적인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비현실감과 이인증(異因症)을 느끼는 건 전형적인 공황발작 증상이라고 하지만, 소설 ‘구토’의 주인공이 남과 같지 않게 느껴지고, ‘절규’ 속의 주인공처럼 공포감에 빠질 때도 없지 않다. 아마도 지구 온난화가 빚은 네팔의 대홍수 참사 때문이기도 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 때문이기도 한 것일까. ‘제3의 극지’로 불리는 힌두쿠시‧히말라야는 많은 눈과 얼음을 저장한 지역으로 6만 3천700백 개 이상의 빙하가 분포돼 있으며, 온난화 현상 때문에 빙하가 녹으면서 빙하 호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빙하가 녹는 속도도 2000년대와 비교하면 2010년대에는 65% 정도나 빨라졌다고도 한다. 전문가들은 빙하가 빠르게 사라질수록 고지대에 생긴 ‘물그릇’(호수)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지만 대비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네팔은 이미 2016년 에베레스트 인근 빙하 호수 아래 인공 배수로를 만들어 수위를 낮추고 위험 하류의 위험 구간 마을들에 자동 경보 사이렌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호수를 이런 방식으로 관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빙하 쓰나미는 단순한 홍수가 아니라 산사태처럼 물과 흙, 돌들이 함께 떠내려오므로 엄청난 재앙을 빚는다는 사실을 네팔의 대홍수 참사가 말해주고 있어 지구촌의 공포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구의 온난화는 앞으로도 어떤 대재앙을 빚을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혹성(지구)이 생태적인 대재앙으로 치닫는다고 경고해 왔다. 그래서 녹는 빙하, 계속 올라가는 대기 온도, 기상이변에 따른 재앙은 날이 갈수록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감에 빠지게 한다. 어떤 과학자는 ‘우리 인간은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처럼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라며, ‘우리는 재앙을 향해 가고 있다’고 지적한 바도 있다. 우리는 더구나 지구 생명체의 3분의 2를 멸종시킨 ‘오르도비스기 대멸종’의 기억도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이 대멸종은 초신성(超新星)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감마선이 지구의 대기 물질을 파괴하자 태양의 자외선이 평소의 50배 이상으로 강하게 생명체에 영향을 미쳤던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지금 추세로 온난화가 계속된다면 지구는 사막화, 홍수, 해면 수위 상승 등 급격한 변화 때문에 공포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히말라야에는 200개 정도의 시한폭탄이 더 있다고 하니 네팔의 대참사는 이제 시작일는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거기다 요즘 지구촌은 전쟁 공포가 덮치고 있는 상황이며, 안보 문제가 그렇듯이 한반도의 운명도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으니 뭉크의 ‘절규’가 지나쳐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어쩌면 우리는 날이 갈수록 ‘두려움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의식 자체가 체질화돼 가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심지어 두려움의 문화로 먹고사는 ‘공포 사업’이 여전히 호황이라니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명화들을 화집으로라도 들여다보려 하다가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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