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가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단종 복위 운동을 모의하다 동료 김질의 밀고로 처형된 사육신들의 묘가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결하였다. 
 
나머지 인물들도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을 당했으므로 이곳이 실제 처형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이들은 삼족을 멸하란 어명으로 가족들까지 모두 70여 명이나 처형당하였기에 장사를 지내줄 만한 사람이 없었고, 이에 매월당 김시습이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묻은 것이 묘역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사육신 하면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이개, 하위지의 여섯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묘역에 올라 보면 일곱 기의 묘가 있다. 이는 1977년 금녕김씨 가문에서 공조판서를 지낸 김문기도 단종 복위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므로 사육신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를 포함해 7기의 묘가 조성된 것이다. 
 
현장에 올라 보면 왼쪽에는 하위지, 성삼문, 유성원의 묘가 있고 약 10m 떨어진 오른쪽에 이개, 유응부, 박팽년, 김문기의 묘가 있다. 처음에는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의 네 사람 묘만 있었으나 1977년 서울시에서 묘역 정화작업을 할 때 하위지·유성원·김문기까지 세 분도 가묘(假墓)를 만들어 일곱 분의 묘역을 완성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이들의 가문은 부모, 형제 자식까지 모두가 처형당해 멸문지화를 입었으나 다행히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인 성주이씨가 임신 된 상태로 관비가 되어 친정 근처로 내려오는 바람에 유일하게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임산부였기에 관에서는 아들을 낳게 되면 반드시 죽이란 명까지 내려진 상태에서 아들을 낳았고, 때마침 같은 시기에 여종이 낳은 딸이 있어 몰래 바꾸어 키워낸 끝에 대를 잇게 되었다. 
 
훗날 박팽년의 현손인 박계창 공이 할아버지의 제삿날 밤 꿈속에 사육신 여섯 어른이 사당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다섯 분의 제물도 같이 차려 제사를 모셨다고 전한다.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대구시 달성군 묘골마을에 자리 잡아 살면서 마을의 입향조가 되었고, 이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풍수적 길지로 그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후로 조정에서는 사육신들의 신원 회복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숙종 17년(1691)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역적에서 충신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한남정맥인 용인시 백운산(565m)에서 북으로 뻗어 올라간 지맥이 과천시의 청계산(592m)을 일으키고 여기서 한쪽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나와 서울 신림동의 관악산(629m)에 이른다. 관악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올라간 지맥이 동작구 서달산을 지나 다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와 사육신 묘역에 혈장을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이곳 혈장에 대해 묘 뒤의 만두가 잘 형성됐고 국립묘지 쪽에서 뻗은 내룡맥이 제대로 응결된 명당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주변에 사신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장풍국을 이루지 못하는 등 풍수 원칙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